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의 손가락, 거하는 집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은 믿음의 아브라함이라
갈라디아서 3:7
믿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입양 자격입니다. 오늘, 제27주 일요일 일반 예식의 리트르그는 두 페이지를 마주 대조하여 서로를 비추게 합니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정의가 믿음에서 비롯되며, 율법의 준수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루카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성채를 무너뜨리는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이는 같은 신비의 양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왕국이 악마를 쫓아내는 기도는 하나의 은총의 양면이며, 이는 사람을 억압하던 것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집에 아들로서 자리매김하게 합니다.
I. 약속이 율법보다 앞선다
바오로는 율법과 예절에 의지하려 하는 공동체에 대한 유혹에 맞서, 약속의 선재를 강조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왜냐하면 성서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의로 입히실 것을 미리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이 너희 안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3:8). 사도는 새로운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설명합니다. 보편적 축복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에서 이미 내재하고 있었고, 율법은 그 후에 등장하여 교육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믿음의 아브라함은 모든 축복을 물려받으며 (갈라디아서 3:9), 축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축복을 주지 않고 저주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0). 따라서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갈라디아서 3:11). 이 감옥에서 벗어난 것은 율법의 개정에서가 아니라 위치의 변화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저주되는 자가 되셨다 (갈라디아서 3:13). 이 교환의 결과는 명확하고 구체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고, 우리는 믿음을 통해 약속의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 (갈라디아서 3:14). 십자가는 율법이 줄 수 없었던 축복을 위한 대가였다.
II. 신의 손가락과 약한 자의 강함
복음서는 악마와의 대결에서 같은 해방을 가시적인 영역으로 가져옵니다. 어떤 이들은 악령 추방에 대해 예수님을 비방하며, 벨제불, 악령의 우두머리로 추방한다고 비난합니다(루카 11,15). 이에 대한 답변은 악의 내재적 논리에 의해 모함이 밝혀집니다. 분열된 왕국은 멸망하고, 사탄이 사탄을 공격한다면 그의 권세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루카 11,17-18). 해방의 힘을 주는 것은 억압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님께서 직접 주신 해석의 열쇠는 구원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구인, *in digito Dei eicio daemonia*를 통해 악령을 쫓아내는 것은 신의 손가락으로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노라(루카 11,20)입니다. 신의 손가락은 성령입니다. 이는 바울이 믿음으로 받은 성령과 같습니다.
강도의 비유는 결과를 확인시켜 줍니다. 잘 무장한 강도가 자신의 성을 지키면 재산과 평화가 보장되지만, 더 강한 자가 오면 그를 이기며, 그가 신뢰했던 무기를 빼앗고, 약탈품을 나눠 갖습니다(루카 11,21-22). 더 강한 자는 그리스도이며, 약탈당한 성은 인류입니다. 그러나 같은 장은 오류에 대한 경고도 전합니다. 악령은 떠나도 황폐한 곳을 떠돌다가, 집을 청소하고 장식하지만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더 나쁜 일곱 악령을 데려와 그 사람의 결말을 더 악화시킵니다(루카 11,24-26). 악령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III.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자
두 독서는 하나의 지점에 수렴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은 강함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고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14), 루카는 이 성령이 신의 손가락으로 악령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린다고 설명합니다(루카 11,20). 바울의 서신에 선언된 정의와 복음서에 기록된 승리는 평행한 사실이 아니라 같은 사건입니다. 믿음은 문 앞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집의 주인이 되는 열쇠입니다.
빈 집에 대한 경고는 이 교리를 보호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순간이 아니라 거주지입니다. 성령은 일시적인 힘이 아니라 영구적인 손님입니다. 빈 집은 다시 적의 요새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공허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오직 거룩한 존재의 현존과 함께할 때만 유지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절된 행동이 아니라 일생을 걸은 순례였습니다. 우리의 위속에 있는 입양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은혜는 공허함 속에서 보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존 속에서 보존됩니다.
IV. 마리아, 아브라함의 딸이자 거처가 된 집
마리아는 오늘의 독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진리는 가장 순수합니다. 그녀는 살과 피로, 그리고 더욱 신앙으로 아브라함의 딸이며, 조상의 약속이 그녀에게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니피카트(Magnificat)는 하나님이 자신의 종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선포하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셨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루카 1,54-55). 바오로가 율법 반대편에서 주장하는 믿음의 정당화는 바로 이 마리아의 모습에서 완성됩니다. 그녀의 ‘예’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도달하고, 말씀에 따라 그녀가 어머니가 되는 그 순간에 극치에 이릅니다(루카 1,38). ‘내게 이루어지시오’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완성과 초월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동의하는 것은 성령의 그늘 아래에 있는 가장 완벽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또한 결코 비어 있지 않은 집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케카리토메네'(kecharitomene), 은총으로 가득 찬 이(루카 1,28)로 불립니다. 그녀는 어떤 전투에 앞서 성령으로 채워졌고, 따라서 새로운 에바, 그 자손이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여성(창세 3,15)이 됩니다. 복음이 경고하듯이, 비어 있는 집은 악한 영혼들이 다시 차지하지만, 마리아는 빛나는 대조, 은총으로 가득 찬 집을 보여줍니다. 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처녀 마리아가 ‘신앙의 순례’를 통해 나아갔으며, 아들과의 연합을 십자가에까지 충실히 지켰음을 가르칩니다(루멘 지우늄, 58항).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집을 비워두지 않는 것은 그녀 안에서 완벽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오늘의 예배는 마리아의 두 가지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녀는 이미 살았습니다. 자신의 공로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 바오로가 갈라타인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의 집을 비워두지 않는 것, 예수님이 복음에서 경고한 것입니다. 성 바오로 6세는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믿음의 모범을 따르도록 촉구하며,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으며, 사랑과 봉사의 영이 그녀의 삶의 숨결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마리아 경배, 35항). 그녀를 본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령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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