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

Rosto de Jesus no rosto de Maria

서론

이 성찰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Novo Millennio Ineunte(16-28항) 제2부, 곧 “관상해야 할 얼굴”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다음 본문을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 마리아 도상학과 관상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아마도 언제나 의식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분을 “보게” 해 주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얼굴에 대한 온전한 관상에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이릅니다. 침묵과 기도의 체험만이, 그 신비에 대한 가장 참되고 충실하며 일관된 인식이 무르익고 자라날 수 있는 합당한 지평을 열어 줍니다. 그 신비는 복음사가 요한의 장엄한 선포에서 그 정점의 표현을 얻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도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니,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이었다”, (요한 1,14)”, (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서한 Novo Millennio Ineunte 16항과 20항).

저는 강생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간의 얼굴을 취하신 다음, 무엇보다도 먼저 어머니께 새로운 얼굴을 주시고, 그 어머니를 통하여 또 그 어머니와 함께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얼굴을 주신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곧 마리아의 얼굴과 모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0.45).

이 주제를 네 가지 성찰로 전개하겠습니다. 얼굴의 상징에 대하여, 예수님 얼굴의 진리에 대하여,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얼굴의 변모에 대하여, 그리고 개인의 상상 세계와 시각이 지배하는 오늘의 문화 안에서 마리아의 얼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얼굴의 상징

얼굴은 모든 사람의 보이는 인격적 신원이며, 알아보게 해 주는 “3×4 증명사진”입니다. 얼굴에는 사람의 모든 외적 감각이 집중되어 있으며, 특별히 입술에 자리한 촉각까지도 그러합니다. 정면에서 본 얼굴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의미에 앞서 이미 신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척수가 지나가도록 허용하는 두개골 아래쪽의 내부 구멍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구멍은 앞쪽과 옆쪽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감각 기관과 관련된 뇌신경과 혈관이 지나갑니다. 시신경을 위한 구멍은 시각에 쓰이고, 사골의 사판은 후각에 쓰이며, 청신경과 안면신경을 위한 옆쪽 청각관은 청각에 쓰이고, 설인신경을 위한 옆쪽 구멍은 미각에 쓰입니다. 얼굴의 이러한 해부학적 구조는 정면성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정당화해 줍니다. 정면성은 몸에서 가장 표현력이 풍부한 부분들, 곧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입술을 하나로 모읍니다. 그러므로 어째서 이마가 모든 시대의 도상학에서 지혜의 상징이 되는지, 또 어째서 예술이 노인과 현자의 얼굴에 넓은 이마를 즐겨 그리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세부 하나를 들자면, 이마에서 내려와 얼굴을 둘로 나누는 듯이 보이는 코는 흔히 모듈식 인체 측정에서 측정 단위로 쓰입니다. 그리고 몇몇 도상학자에 따르면, 예수님 얼굴의 코는 하느님 강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가장 영적인 것(눈)과 가장 감각적인 것(입)을 이어 주며, 그리하여 눈썹뼈 활과 더불어 십자 표시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가장 미적이고 가장 영적인 감각은 시각과 청각, 곧 눈과 귀입니다. 얼굴과 목소리, 빛과 소리는 우리 체험의 특권적인 영역을 이룹니다. 더구나 눈과 귀는 우리 얼굴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우리가 바라보거나 듣는 것을 향하여 얼굴을 정면으로 놓이게 합니다. 그리고 얼굴의 이러한 정면성은 우리 인격의 상처받기 쉬움도 드러냅니다. 눈은 가려질 수는 있어도 거짓말할 수는 없고, 귀는 소리에 대하여 닫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바라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고, 들음 안에서 각인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처받기 쉬운 심신의 조직 위에서, 시각과 청각은 영을 위하여 현실 전체를 향한 두 개의 열림과 같은 일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려면 사람은 현실에 자신을 노출하고 상처를 입히거나 입을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이 위험은 봄이 바라봄이 되고 소리가 말이 될 때 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바라봄과 들음이 서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위험은 더 쉽게 극복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마태 13,16-17).

눈은 우리 영이 몸으로 열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바라볼 수 있고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눈은 사람 전체입니다. 홍채가 눈을 요약하고, 눈꺼풀과 눈썹을 지닌 눈이 얼굴을 요약하며, 얼굴이 몸을 요약하고, 몸이 온 우주를 요약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빛을 받아들일 때 눈은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몸도 밝을 것이다. 그러나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마태 6,22-23). 그리고 이는 신체적인 의미에서도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눈은 그 자체의 빛을 내뿜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의 빛이 사물을 보이게 하듯이, 눈의 밝음은 사물이 해석되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얻도록 해 줍니다.

그러므로 바라봄은 마음의 생각을, 곧 사물과 사람의 세계와 맺는 우리의 관계가 달려 있는 저 현실 해석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이 사람을 그 내적 진리 안에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라봄은 바로 그 영적 내면성에서 불붙어, 인격적 자아가 지닌 지향성의 유기적 번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눈은 무한 앞에서 가장 벌거벗은 자리이다”, (O. Clément, Il volto interiore Jaca Book, Milano 1978, 44). 바라봄 안에 사람 전체가 있으며, 그 사람은 자신의 역사적 현실을 지니고 언제나 또 다른 바라봄을 찾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두 사람이 신체적 접촉보다 훨씬 앞서 시선으로 만난다는 것을 압니다.

바라봄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곧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그의 기대와 환멸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과 기쁨을 내뿜는, 생기를 주는 맑은 바라봄이 있습니다. 온전히 실현된 사람이나 성인의 바라봄이 그러한데, 그것은 온통 받아들임이고 긍정적인 현존이며 고요한 투명함입니다. 또한 채울 수 없는 탐욕을 드러내는, 신의 없고 죽음처럼 차가운 바라봄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굳어 버리게 하고 세계를 빼앗는 바라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안에서는 얼굴의 움직임이 뒤집힙니다. 더 이상 위에서 아래로, 곧 하늘의 것이 땅의 것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곧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지워 버립니다.

지각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며, 어떤 바라봄을 포착한다는 것은 세계 안에서 바라봄이라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그 바라봄이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은 한), 우리가 바라보여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눈이든 그 눈이 드러내는 바라봄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로 나를 돌려보냅니다. 내 뒤에서 나뭇가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느끼는 것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 상처 입을 수 있는 몸을 지녔다는 것, 내가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내가 무방비로 있는 그 공간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내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라봄은 무엇보다도 나에게서 나 자신에게로 나를 돌려보내는 매개입니다. 타인의 바라봄과 바라봄의 한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나에게 드러내 주는 것은 부끄러움이나 자만입니다. 그것들은 바라보여지는 상황을 내가 인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게 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며, 내가 바로 다른 이가 바라보고 판단하는 그 대상이라는 사실의 인정입니다. 나는 오직 나의 자유가 주어진 대상이 되고자 나에게서 벗어나는 한에서만 그 자유를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본디 나의 반성 이전의 의식이 바라보여진 나의 자아와 맺는 유대는 인식의 유대가 아니라 존재의 유대입니다. 나는 모든 인식을 넘어서, 다른 이가 인식하는 그 자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인 그 자아를, 나는 다른 이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어떤 세계 안에서 그것으로 있습니다. (참조: J.-P. Sartre, L’essere e il nulla Il Saggiatore, Milano 1972, 328.331).

사람은 얼굴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기 삶의 단계를 새깁니다. 유년기의 평온함이나 상처, 사춘기의 곡절, 젊은 시절의 모험이나 대담함, 성인기의 멈춤, 노년의 묵상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각 나이의 얼굴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눈물과 미소에서 옵니다. 눈물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약한 이의 힘을 드러내며, 죽음보다 강한 생명과 미움을 이기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미소는 신뢰의 몸짓과 친교를 향한 대담한 제안과 다시 시작하려는 끈질긴 의지를 얼굴에 옮겨 놓습니다. 많은 경우 미소 하나나 눈물 한 방울이, 강물처럼 쏟아지는 말로도 어찌할 수 없는 관계를 풀어 줍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자기의 귀를 사용하는데, 귀는 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어떤 반성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귀는 듣고 또 자기 자신을 들을 수 있지만, 눈은 보되 자기 자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청각이 포착하는 첫 소리는 생명의 표지를 보내는 자기 몸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사람이 어떻게 소리를 내고 말하기에 이르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말은 분절되고 의미를 담은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호나 일련의 기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애를 쓰고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통을 시도할 때 들이는 바로 그 노력입니다.

바라봄과 들음이, 이미지와 말이 서로 만나 그 의미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인격 사이의 소통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이미지의 충만한 의미는, 눈이 사람을 그 내적 진리 안에서 드러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라봄은 바로 그 영적 내면성에서 불붙어 인격적 자아가 지닌 지향성의 유기적 번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눈은 무한 앞에서 가장 벌거벗은 자리이다”, (O. Clément, Il volto interiore Jaca Book, Milano 1978, 44).

그리고 말이 소리라면, 그 “빛”은 음악입니다. 전례 행위 안에서 “말에 내재하는 음악과 이미지에 내재하는 빛은 미적 아름다움을 빛의 섬광처럼 터뜨리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적 몸 위에 끊임없이 내려와 머무르시는 성령의 형언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O. Clément, I visionari: saggio sul superamento del nichilismo Jaca Book, Milano 1987, 223).

예수님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에서 우리는 사람의 얼굴이 지닌 아름다움과 존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imago Dei)이 자신의 참된 얼굴(similitudo Dei)을 되찾도록 당신 자신에게 인간의 얼굴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온 인격과 역사 안에서, 육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이게 하십니다. 그런데 얼굴은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듯이 그분 인격의 특권적 표현을, 따라서 그분 신성의 특권적 표현을 실현합니다. 얼굴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육신의 형태로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2,9). 그러므로 성화상 옹호자들은 자주, 필립보가 예수님께 청한 말씀에 대한 그분의 대답을 인용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8-9). 이러한 이해 방식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이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늘도 담을 수 없는 분께서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 취하신 육신의 몸 안에 당신을 한정하셨습니다. 비잔틴 전례력에서 정교 주일의 kontákion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씀이 당신 안에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려질 수 있게 되셨나이다,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그리고 죄로 일그러진 우리의 모상을 옛 존엄으로 회복시키시어 그것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결합시키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시의 완성이시며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 선물의 완성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보이시려고 얼굴을 취하시고, 당신을 들려주시려고 목소리를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우리가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보는 것이 이루어진다. 곧 온 인류와 온 우주의 받아들여짐이다 […]. 말씀은 한 분을 통하여 모든 이 안에 머무르셨으니, 하느님의 참되고 유일한 아드님에게서 이 존엄이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건네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O. Clément, Il volto interiore Jaca Book, Milano 1978, 30).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거룩한 변모의 사건에서, 목소리의 울림과 얼굴의 빛으로 모든 이와 모든 것 위에 창조의 첫날이며 유일한 날의 생명 에너지를 눈부시고 신적인 광채로 비추셨습니다(참조: 창세기 1,5).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미술은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초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재구성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은 그분 인격의 몇몇 본질적인 면을 드높이고자, 이교 신들의 얼굴에서 가져온 특징으로 상징적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오직 4세기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얼굴 유형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원으로 감싸인 정면성, 가운데로 가른 머리카락, 깊은 눈썹뼈 활, 긴 콧등, 아래로 향한 뾰족한 콧수염, 지나치게 무성하지 않은 두 갈래 턱수염이 그것입니다. 콤모딜라 카타콤바의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그리스도 흉상과 로마의 성 베드로와 성 마르첼리노 카타콤바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이에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 얼굴의 이 유형은 토리노 수의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 유형을 다시 취하는 것으로 보이며, 수의 연구 전문가들은 그 얼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습니다.

  1. 이마를 가로지르는 선 하나
  2. 눈썹뼈 활 사이에 세 변으로 둘러싸인 V자 모양의 공간
  3. 코가 끝나는 자리의 두 번째 V자 모양
  4. 바라보는 이를 기준으로 다른 쪽보다 높은 오른쪽 눈썹
  5. 매우 두드러진 광대뼈
  6. 바라보는 이를 기준으로 오른쪽보다 넓은 왼쪽 콧구멍
  7. 코와 윗입술 사이의 뚜렷한 선 하나
  8. 그리고 아랫입술과 턱수염 사이의 똑같은 선 하나
  9. 닫혀 있고 약간 도드라진 입
  10. 두 갈래로 갈라진 턱수염
  11. 목을 가로지르는 선 하나
  12. 올빼미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크고 활짝 열린 눈
  13. 이마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 머리카락

수의에 나타난 얼굴의 이러한 특징들은 특히 6세기부터 그리스도의 얼굴들에서 전부 또는 거의 전부 발견되는데, 이는 단순한 상상이나 순전한 우연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분야의 최근 연구는 에데사의 만딜리온의 얼굴(참조: 그리스 교부 총서 CXIII, 423-454)을 토리노 수의의 얼굴과 하나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둘을 동일시하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보존된 제노바 수의의 예수님 얼굴이

“토리노 수의에 나타난 그리스도 얼굴의 치수와 정확히 일치하며, 두 얼굴의 여러 부분들 사이의 비례, 곧 얼굴의 인체 측정 수치가 정확히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G. Ciliberti, Il Santo Sudario e la chiesa di S. Bartolomeo degli Armeni Padri Barnabiti, Genova 1987, 12).

그러므로 예수님 얼굴의 한 유형, 곧 “규범적 얼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정당해 보입니다. 그 얼굴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후대의 작품들을, 여러 인종과 조화를 이루도록 토착화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규정합니다. 그리하여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얼굴은 비잔틴인이나 로마인의 얼굴이 되었고, 에스파냐인이나 아랍인,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얼굴은 인류의 ‘공통된 얼굴’을 이룬다. 곧 얼굴들의 얼굴이다. 다른 얼굴들을 없애고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광채가 그 얼굴들을 꿰뚫어 자신과 똑같은 빛에, 곧 성령의 빛인 그 숨은 불꽃에 투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함과 평화와 축복의 사람 앞에 설 때, 우리는 그가 우리를 감싸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며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광대함에 우리를 결합시킨다고 느낀다. 하물며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의 얼굴은 경계선도 아니고 매혹하는 마술도 아니며, 갈라짐이 폐지되고 다름이 확인되는 빛의 열림이다. 예수님께서는 경쟁하지 않으신다. 그분이신 그 열림 안에서, 그분이 전해 주시는 그 빛 안에서 우리는 가면에서 해방되고 다시 하나로 모아진, 한 인격의 비밀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자리인 타인의 참된 얼굴을 발견한다. 모든 인종과 모든 문화와 모든 경배의 형태가 그 열림 안에서 자기 자리와 궁극적 의미를 발견한다. 성화상 안의 그리스도 얼굴은 빛과 섞인 흙빛으로서 백인종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분화에 앞서, 또한 그 분화를 통하여 드러나는 인류의 심연과 같은 얼굴이다”, (O. Clément, Il volto interiore Jaca Book, Milano 1978, 30-31).

그러므로 예수님 얼굴의 표현은 그분 인격의 현존을 실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은 신적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에게서 나셨고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신 분의 인격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창조로 말미암아 말씀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유한한 실재 안에 현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3). 바오로 사도는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좌나 주권이나 권세나 권력이나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콜로 1,15-17).

그러나 말씀이신 하느님의 강생 신비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얼굴은 그분의 인간적 현존도 실현합니다. 성부의 말씀과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하나의 유일한 인격이십니다. 그리고 현존은, 그 칭호와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인격과 관련됩니다. 실제로 영광 중에 사시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형태의 현존을, 곧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루어지는 현존을 실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인식되고 받아들여진 하느님의 말씀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봉사가 되는 저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려고, 우리가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려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기도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려고 당신 얼굴의 모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제자들을 모으시려고 그들의 모임 안에 현존하십니다. 당신 몸과 피의 거룩한 성체 성사의 예물 안에, 그것으로 자신을 기르는 이들을 당신께 동화시키시려고 현존하십니다.

그분 현존의 여러 목적은 성체 안의 현존에서 온전한 이유와 완성을 발견하니, 그것은 성령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상호 증여의 지극한 순간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계시의 모든 말은 목소리가 되신 하나의 영원한 말씀 안에서 방향을 얻고 이해되며, 모든 성화상은 얼굴이 되신 성부의 유일한 동일 본질의 모상 안에서 방향을 얻고 이해됩니다(참조: 히브리 1,1-3).

이 문단의 결론은, 교회 교부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라서도 예수님 얼굴의 성화상이 모든 성화상의, 곧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화상의 어머니 성화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협력의 살아 있는 인장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표현하시는 말, 곧 사람이 되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침묵하고 감추어져 결코 소진되지 않는 말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얼굴의 빛 안에서 걷기를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참조: 시편 88[89],16).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성미술에서 하느님의 유일한 참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다른 모든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특징을 재현하는 한에서, 그리스도의 성화상에 참여함으로써 성화상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바로 그 모상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주님의 영의 활동에 따른 것입니다”, (2코린 3,18). 이것이 예수님의 모든 제자에게 해당된다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예수님과 가장 깊이 결합된 분께는 지극한 광채와 힘으로 해당됩니다. 그분의 태중에서, 그분의 동의로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은 마리아의 얼굴 안에 현존합니다. 아들의 얼굴이 어머니의 얼굴 안에 현존하며 그 닮음을 재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과 닮은 원인은 자연적인 동시에 초자연적이니, 곧 마리아의 신적 모성입니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짧은 본문 하나를 다시 읽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완전한 하느님이시며 이성적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사람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신성에 따라 세세에 앞서 성부에게서 나셨고, 인성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 구원을 위하여 때가 찼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신성에 따라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며 인성에 따라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니, 두 본성의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 한 분 아드님, 한 분 주님을 고백합니다. 혼합 없는 결합이라는 이 개념에 따라 우리는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고백합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강생하시어, 잉태되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분에게서 취하신 성전을 당신께 결합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에페소 공의회, 일치 신조 세계 공의회 문헌집, UTET, Bologna 1978, 148).

마리아께서는 성부의 뜻에 대한 당신의 동의로 말씀이신 하느님의 강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협력하시며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을 주셨습니다(콜로 1,15). 이제 새로운 하와이시며 참으로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신 분께서는 피조물에게 가능한 온전한 충만함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빛나시니,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사람을 신화(神化)하시려는 성부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아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로마 8,28-30).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유일한 완전한 성화상이시며, 하느님 아드님의 모상에 온전히 일치하는 모상이십니다. 이는 그분의 거룩함 때문인데, 그 거룩함은 어머니와 아들의 인간적 관계를 없애지 않고 오히려 드높이며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얼굴에 예수님의 얼굴이 비추이니, 바로 마리아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에 자취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은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타오르는 닮음의 관계 안에서, 곧 인성과 신성의 충만함의 관계 안에서 하나로 녹아듭니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육신의 형태로 머물고 있으며, 우리도 그분 안에서 그 충만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콜로 2,9-10).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에 참여한다면, 완전한 동정성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시어 그분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사람이 되시도록 해 드린 분, 곧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더 그 충만함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마리아의 얼굴도 예수님의 얼굴처럼 자기만의 규범성을 지닙니다. 별로 관을 쓰고 너울을 쓴 머리(여왕이신 분), 빛나고 어머니다운 얼굴(동정 어머니), 자비로운 바라봄(자비의 어머니)이 그것입니다.

여왕이신 분

마리아의 얼굴은 언제나 머리를 덮는 너울에 둘러싸여 있고, 이마 위에는 별 하나가 있습니다. 너울은 “주님의 여종”이신 마리아를 뜻하고, 별은 그분의 완전하고 영원한 동정성을 뜻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으시기에 이를 만큼 언제나 성부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군중 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루카 11,27-28). 하느님 아드님의 잉태에 대한 당신의 동의로 마리아께서는 우리 구원의 완성에, 곧 “영원에 걸쳐 감추어져 있던 신비”에 유일한 방식으로 참여하십니다, (로마 16,25). 그러므로 너울은, 얼굴이 너울 밖으로 드러나듯이, 우리 구원의 신비에 대한 이 온전한 계시도 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어린 순종으로 마리아께서는 말씀이신 하느님의 강생에만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도 참여하십니다. 아드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듯이”, (필리피 2,8), 순종하는 여종이신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영혼이 고통의 칼에 꿰찔리도록 내맡기시고(참조: 루카 2,35), 동의하는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온전히 참여하심을 실현하십니다(참조: 로마 8,17).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보다 앞서, 또 그보다 더욱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그러므로 그분 안에서도 성부께서 원하신 영광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드높이시듯 어머니도 드높이시어, 그분을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 계신 여왕으로 인정하시고 선포하십니다, (필리피 2,10).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아드님과 이루는 그 영광스러운 결합에서, 여왕이 되신 마리아께서는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권능을 받으시니, 모든 피조물 위에, 특히 하느님께 반역한 피조물들 위에 있는 권능입니다. 여기에서 악의 영들에 맞서는 그분의 강력한 보호가 나옵니다.

동정 어머니

마리아의 얼굴은 온통 빛납니다. 온통 예수님의 얼굴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너희 얼굴이 빛나리라”, (시편 34[33],6). 온전한 동정녀이신 마리아께서는 모든 더러움에서 보호되셨습니다. 조상들의 정화와, 언제나 그분을 당신 그늘 아래 두시는 성령의 활동과, 그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악은 그분 안에서 무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아드님 얼굴의 빛남에 참여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그분의 빛은 결실 맺는 동정성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하신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창조되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창조의 업적에서는 부모의 사랑(부부의 결합)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이런 경우가 아닙니다. 한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을 취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두 의지의 협력만이 있습니다. 곧 마리아의 예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예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잉태되기 전에 미리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부의 품 안에 미리 존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강생이, 곧 말씀이신 하느님의 동정 잉태가 마리아의 영광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옵니다.

더구나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일에서만이 아니라 그분을 기르신 일에서도 당신의 모성을 완전하게 실현하셨습니다.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으셨을 때, 곧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의 교육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은 틈새를 볼 수 있습니다, (루카 2,46). 그분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루카 2,48). 마리아께서는 아버지를 앞자리에 두십니다. 물론 이 세부를 단순한 문화적 관습으로 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고유한 교육 방식에 따라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의 정신 건강이 아버지와의 좋은 관계를 요구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마리아께서 예수님과 요셉의 이 관계를 북돋아 주셨다고 생각할 좋은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낳고 자라게 하고 기르심으로써 당신의 모성을 온전히 실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이제 어머니의 얼굴을, 곧 보편적 모성의 얼굴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성령의 개입으로 그분 안에서 본래 자연적일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만드시기 때문이니, 곧 여인의 얼굴, 새로운 하와의 얼굴입니다. 신적 모성은 그분 안에 여성성과 받아들임과 전구의 모든 은사를 불붙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사는 지나가지만 “사랑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1코린 13,8-10).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신자와 아담의 모든 자녀를 향한 모성을 여전히 행사하십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의 모성은 우리에게 아드님을 주시는 성부의 부성을 인간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머니께서는 성부의 hesed를, 곧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더 정확히는 자애의 사랑을 드러내시니, 그 사랑은 곧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자애의 표현은 Eleusa 유형의 성모상에서처럼 마리아의 얼굴이 아기 예수님의 얼굴과 맞닿을 때 더욱 두드러집니다.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의 바라봄은 자비롭습니다. “Salve Regina” 후렴에서 전례는 이러한 표현을 씁니다. “mater misericordiae, vita, dulcedo et spes nostra […]. illos tuos misericordes oculos ad nos converte!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 당신의 그 자비로운 눈을 저희에게 돌리소서!]”.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께서는 아직 새 신자였던 후안 디에고에게 이러한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완전하고 늘 동정이신 거룩한 마리아, 참되고 유일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나는 이곳에 나의 작은 거룩한 집이 지어지고 나를 위한 성전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온 인격적 사랑으로, 나의 자비로운 바라봄(en mi mirada compasiva)으로,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으로 그분을 보여 주고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자 한다. 참으로 나는 너희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니, 곧 너의 어머니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의 어머니이며, 나를 사랑하고 나를 부르며 나를 찾고 나에게 온전히 신뢰를 두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다”, (Nican Mopohua 26-31면).

마리아의 이 자비로운 바라봄은 모든 성모 성화상의 한결같은 특징으로서, 아담과 아담의 모든 자녀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을 드러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한 3,16). 성모 성화상에서 관상하는 이를 응시하는 동정녀의 눈과 구원자를 가리키는 그분의 손은, 바라보여지도록 또 이끌리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이에게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결의 마리아의 믿음을 건네줍니다. 마리아의 모성은 “당신의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신” 성부의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로마 8,32).

이 문단을 마무리하며 저는 마리아의 보편적 모성이 도상학적으로 그분의 토착화된 얼굴 안에 옮겨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얼굴은 모든 인종의 생김새와 모든 땅의 빛깔과 모든 언어의 울림을 취합니다. 이 신앙의 차원은 마리아의 얼굴에 유럽인, 아프리카인, 일본인, 라틴 아메리카인의 특징을 부여하는 각 민족의 예술에서 표현을 얻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동정 마리아께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실 때 바로 그 토착화의 일을 몸소 하신다는 점입니다. 아주 강한 예가 과달루페의 성모님 얼굴입니다. 아직 혼혈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던 때에 혼혈의 얼굴 모습을 취하셨으니, 그분의 얼굴은 멕시코시티 정복 십 년 뒤인 1531년 12월 12일에 후안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마리아께서 얼굴 없는 이에게 얼굴을 주시며 개인들과 민족들에게 계속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세계 속 마리아의 얼굴

이미지는 보는 기능과 관련되며 공간성 안에서 실현됩니다. 말은 듣는 기능과 관련되며 지속 안에서 실현됩니다. 시각적인 것(텔레비전적인 것)은 공간적(지구적)이고, 소리는 시간적입니다. 이미지는 현실을 제시합니다. 말은 현실에 대하여 발언하며, 우리 지각의 세계를 넘어서는 진리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시각적인 것과 텔레비전적인 것이 지배하는 오늘의 우리 문화에서는, 감각과 지성 사이에, 지각과 진리 사이에 있는 것과 비슷한 이미지와 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강요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상상하지 않고 또 자기 자신과 말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체험입니다. 이미지와 말은 사고와 인식의 활동에, 곧 우리 인격적 자아의 모든 영적 활동에 함께 이바지하며, 그 자아가 감각적 체험을 넘어서도 자신을 표현하게 해 줍니다. 이미지와 말은 영의 활동 안에 공통점을 지니는데, 그 활동은 인식 안에서 공간과 시간을, 사고 안에서 지각된 현실과 진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이는 이미지 또한 우리를 참된 인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성화(聖畫)가 바로 그러합니다. 성화는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계시되고 인식된 그대로, 마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이미지와 말은 서로 보완적이며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69-870년)가 규정한 것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화상 앞에서, 거룩한 복음서 앞에서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부복할 것을 규정한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그 안에 담긴 글자를 통하여 구원을 얻듯이, 마찬가지로 배운 이든 배우지 못한 이든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빛깔의 성화상적 힘에서 유익의 몫을 받는다. 말이 소리로 알리고 현존하게 하는 것을, 그림은 빛깔로 알리고 현존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3조).

그러므로 강생하신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말과 이미지의 결합은 그리스도교의 심장을 이루며, 나아가 그 중심 선언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관상하니, 외아드님이 아버지에게서 받으시는 그 영광이며 사랑과 진실이 가득한 영광이다”, (요한 1,14). 그러니 사람의 영 안에서도 그리스도교 계시 안에서도 봄과 말함 사이에 상호 보완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상호 보완성 안에서 이미지는 말에서 명료함과 규정성을 받고, 말은 이미지에서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다가가는 능력을 받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람의 표현 활동과 관련하여 시각과 청각 사이의, 이미지와 말 사이의 관계를 더 신중하게 성찰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영의 표현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자기 의미를 되찾고, 인식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드러내며, 성찰을 북돋우고 무상성과 아름다움의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 얼굴의 의미에 관하여 우리가 드러낸 바로부터 두 가지 구체적인 적용이, 곧 마리아의 얼굴이 활동하는 두 영역이 열립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 안에서, 그리고 시각이 지배하는 오늘의 문화 안에서입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 안에서 마리아의 얼굴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은 자신이 바라보여지고 있음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로운 눈에 자신을 바라보이도록 내맡기는 이들에게 치유의 힘을 지닙니다. 마리아의 바라봄은 저마다 자기 어머니와 맺는 관계를 다시 질서 잡고 치유해 줍니다. 우리는 많은 심리적 병이 어머니와 맺는 그릇된 관계의 원인(자녀에게)이자 결과(어머니 자신에게)임을 압니다. 실제로 모성은 하느님의 값진 선물이지만 죄로 얼룩졌으며, 그러므로 구원되어 예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순결한 여인이시며 완전한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얼굴은 인간의 상상 세계에 작용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리하며, 그 재정리는 유익한 결과를 낳습니다. 정신적 성격의 불편함에는 직접적으로, 신체의 질병에는 간접적으로 유익하니, 병자가 자기 병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북돋우는 한에서 그러합니다. 이 길을 통하여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자기 짐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지고 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을 사용하려면 그리스도교 성화상학에 관한 몇 가지 본질적인 정보가 중요합니다. 성화상은 본질적으로 이미지이며, 바로 이미지인 한에서 감정을 가득 담고 있고 행동하도록 자극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은 이 성화상의 여정을 따라 흐릅니다. 은총은 구원 경륜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자연의 길을 따라 흐릅니다.

셈족의 관점에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집니다. 성화상은 성령의 힘을 가득 담고 있는 한에서 혼과 영(우리의 결정 능력)에 작용합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 그리고 그 작용은 몸에도 반향을 일으킵니다.

성화상을 바라볼 때 머지않아 바라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바라보는 이가 자신이 바라보여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바라보이도록 내맡기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천천히 타인에게, 곧 자기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 그 타자성 안에 있는 타인에게 자신을 엽니다. 이러한 바라봄의 회심과 더불어 성화상은 그의 상상 세계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점점 더 깊이 다시 세우기 시작합니다.

모든 성화상은 그림과 빛깔로 이루어집니다. 그림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logos에 작용하고, 에너지의 진동인 빛깔은 eros에 작용합니다. 그리고 치유된 사람은 logos와 eros 사이에, 곧 이성과 감정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이룹니다. 그 건강의 표지는 자기 절제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에서 성화상은 아름다움의 사건이기에 앞서 말씀이신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모든 성화상 안에는 언제나 우리를 온전한 진리로 이끄는 계시된 진리가 있습니다(참조: 요한 16,13). 사람을 “참되게 하는” 것은 바로 발견되고 내면화된 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성화상이 계시하는 이 진리는 주의 깊고 끈기 있게 이어지는 읽기를 요구합니다. 그 에너지의 빛은 받아들임의 침묵 안에서, 마치 기름진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또는 메마른 땅에 부어진 물처럼 주어지며, 자신을 바라보이도록 내맡기는 이 안으로 들어가 그의 정신(생각과 확신)과 마음(상상 세계)을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관상적인 태도가, 곧 깊은 들음의 태도가 요구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성화상의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드러날 수 있는 신비의 새로움에 열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째서 성화상이 침묵과 기도를 요구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성화상을 관상할 때 그 내재적 역동성이 인상적입니다. 성화상은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오늘날 이미지들이 보통 움직임으로 말하는 바를 말해 줍니다. 이 명시적이고 때로는 착각을 일으키는 역동성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받아들이고 무장을 푼 시선을 성화상 위에 고정하는 일이, 곧 “눈과 눈을 마주하는” 일이 조금은 힘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지에 대한 근대적 관념에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성화상은 우리가 표현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창이 아니라, 표현된 신비가 현존하는 자리이며, 그 신비는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자신을 여는 이에게 빛을 내뿜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라보는 이를 바라보는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 앞에서 이러한 종류의 시각적 기도를 끈기 있게(날마다 몇 분씩) 실행한다면, 예수님과 맺는 우리의 신앙 관계가 다시 살아나고 우리의 영적 생활이 나아질 것입니다.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저마다 자기 어머니와, 자기 몸과, 자기 감정적 감수성과 맺는 관계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영혼과 몸의 이원론은 몸을 선택하는 육체 숭배에서 영혼을 선택하는 극단적 영성주의에 이르는 여러 상황을 아우르며, 우리인 인간성을 온전히 살아가는 기쁨 앞에서 부정적이고 때로는 무거운 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 좋은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아무것도 나무랄 것이 없다”(1티모 4,4)는 것을 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의 얼굴은 천사처럼 살려는 이에게 몸의 중요성을, 이성적 동물처럼 살려는 이에게 영혼의 영성과 불멸성의 중요성을 천천히 드러내 줍니다.

감정적 감수성의 평가 절하는 흔히 eros를 성(性)으로 축소하는 왜곡과 결합되며, 지나치게 심해진 내향적 폐쇄에서 사이키델릭한 개방에 이르는 여러 상황을 아우릅니다. 그 공통된 결함은 자신을 선물로 내어 줄 수 있는 성숙한 내면성의 결핍입니다. 인간적 eros의 샘이 오염되어, 개인이 자기 이웃과 참된 친교 안에서 살아가게 해 주는 진정한 관계가 거기에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성화상이 감정의 영역에 미치는 작용은 특별히 효과적이며 감정과 이성 사이에 새로운 조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기쁜 현실과 사건을 쓴 자취를 남기지 않는 기쁨으로 누리게 하고, 역경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고통을 겪게 해 줍니다. 마리아께서 우리를 삶의 시(詩) 안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 생활의 요소들(신체성, 심리, 감정, 가치, 생활 양식)과 사회 생활의 요소들(경제, 환경, 문화, 사회와 공공 서비스) 사이에 있던 조화가 극적으로 깨어져 생겨나는 불편함이나 질병의 상황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그 앞에 자신을 바라보이도록 내맡기는 마리아의 얼굴은, 질병이 지우는 한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 갈 길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끝으로 그 얼굴은 우리를 참된 관계로 열어 줌으로써 의료의 돌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켜, 장기(臟器)의 의학에서 관계의 의학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시각 문화 속 마리아의 얼굴

이 마지막 성찰을 요한 바오로 2세의 바람으로 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 성화상의 재발견은, 광고와 대중 매체 안에서 우리 삶을 좌우하는 수많은 이미지가 지닌 비인격화하고 때로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영향에 맞서 대응해야 할 시급함을 깨닫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성화상은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의 시선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세계의 실재에 다가가게 해 주는 이미지이다”, (요한 바오로 2세, Duodecimum saeculum 11항).

시각이 지배하는 오늘의 문화는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는 이미지들의 즉각성 위에, 논증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들의 연상 위에,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일반화 위에, 그리고 이미지와 구체적 제안들의 유혹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황 성하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교 성화상학은 오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가리키는 이미지들의 우상 숭배를 넘어서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 삶을 발견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세계의 실재를 알아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헛된 유혹에서 해독하고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인간답게 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서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 얼굴이 여인과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여 주기 때문이며, 이는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명령에 따라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안하고 거듭 제안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변화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모든 지역 문화를 획일화할 수 있는 지구적 상부 구조로 자처하는 오늘의 문화에서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 발전과 경제 관계와 우상 숭배적 세계관이 지배합니다. 이는 일의적인 인식이 다른 인식 형태들을 압도하고, 기술과 경제가 과학 연구와 정치를 좌우한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만족시키는 자기 준거적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족과 정치와 예술의 가치, 무상성과 선물의 논리 안에 있는 이타주의의 가치는 살아 내고 지탱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점점 더 강해지는 반대 장애물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시각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텔레비전적이며, 모든 것을 반짝이게 만드는 겉치장은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는 이를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과 대비되는 우상의 의미에 대하여 짧게 밝혀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상이 되는 때는, 그것을 흠모하는 이의 바라봄에 그가 기대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내어 줄 때입니다. 그 바라봄은 자기가 보는 것 안에서 흠모할 만한 모든 것을 발견하며, 그러므로 거기에 머물고 쉽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드는 것은 바라봄이지 바라봄을 만드는 것이 우상이 아니다. 이는 우상이 자기 자신의 가시성으로 바라봄의 지향을 가득 채운다는 뜻이다”. (J.-L. Marion, Dio senza essere 24).

반대로 성화상은 자기의 보이는 것 안으로 바라봄을 불러들여, 자신이 보여 주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그에게 보여 주고, 그를 바로잡으며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더 멀리 바라보도록 북돋웁니다. 그리하여 성화상은 자기의 보이는 것을 상대화하는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남이 되며, 어떤 면에서는 바라봄의 기대를 좌절시킵니다. 이로써 성화상은 바라봄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고, 모든 봄과 모든 인식을 초월하는 것의 깊이로 그 바라봄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 얼굴의 성화(聖畫)에도 해당됩니다. 단순한 장식으로 걸려 형식적인 미적 가치로 평가되는 성화상은 우상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문화의 작용은 본질적으로 자기 준거적입니다.

마리아 얼굴의 성화상은 이 “인광을 내는” 세계에 강력한 교정의 답을 줍니다. 그것이 여인의 얼굴이며 어머니의 얼굴이고 기도하는 이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으로서 그분께서는 지배적인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을 넘어서는 직관의 온기를 되찾게 해 주시고 인격 사이의 관계를 북돋우십니다. 그분 자신이 사촌 엘리사벳에게 봉사하러 달려가시는 몸짓에서 견줄 데 없는 본보기이십니다. 어머니로서 그분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자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분의 실제적인 심리적 모성으로, 자기 성장에 필요한 애정을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채 여자에게서 태어난 다른 모든 이를 자유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 예수님을 공생활에서 함께 걸으며 도와드릴 줄 아셨듯이, 모든 사람을 그의 사생활과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함께 걸으며 도와주실 줄 아십니다.

그러나 마리아 얼굴의 가장 강한 기여는 신앙에 있습니다. 성모 영보 때 천사의 인사 앞에서처럼 놀라워할 줄 아는 여인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참으로 들을 줄 알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실행하는 여인이십니다.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갈바리아까지 끝까지 견딜 줄 아는 여인이십니다. 파스카의 날까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릴 줄 아는 여인이십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사람이 그에 따라 창조된 imago Dei가 인간 존재의 구성 원리이며, 자기의 신적 원천을 온전히 향하고 있어 그 원천으로 끊임없이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의 선물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모상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여왕이시며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얼굴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이를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으로 부드럽게, 어머니다운 자애로 이끌어 주십니다.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난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에게 단순하고 쉽고 기쁜 길을 열어 주어, 우리의 인간적 존엄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우리의 소명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똑같은 거룩함을 지닌 성인이 되는 소명을 다시 발견하게 해 줍니다.

“거룩함의 길은 여러 갈래이며 저마다의 소명에 맞갖은 것이다”, (Novo Millennio Ineunte 31항). 그러나 그리스도 얼굴의 참된 성화상이신 마리아의 얼굴은 거룩함의 모든 여정을 불러 모을 수 있으며, 침묵과 기도를 소중히 여기는 관상 생활의 담백한 감미로움을 건네줌으로써 “거룩함의 교육학”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 얼굴의 관상을 더 깊이 하도록,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Rosarium Virginis Mariae는 마리아의 눈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관상하도록 초대합니다.

학업을 더 깊이 하십시오: 마리아론, 마리아 신학, 성모 발현, 그리고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마리아 관련 교육을 이어 가십시오: 마리아론, 마리아 신학, 성모 발현에 관한 저희 자료를 살펴보십시오. Locus Mariologicus 학술원의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만나보세요.

마리아의 얼굴과 그리스도와 맺는 그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더 깊이 하려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ater를 참조하십시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마리아론 심화 교육을 원하십니까? 신학적 엄밀함과 영적 생활과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을 하나로 잇는 학술 교육인 Locus Mariologicus의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만나보세요.

대기자 명단에 등록하기 →

가장 오래된 마리아 성화를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서 만나보세요.

마리아론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으십니까?

이 글은 Locus Mariologicus 도서관의 장서에서 나왔습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은 학술적 동반과 함께 여러분을 바로 그 원천으로 이끕니다. 성경, 교회 교부, 교도권을 첫 교의에서 현대의 물음에 이르기까지 다룹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만나보기

Related Articles

Respon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