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론 미학에서의 숭고한 아름다움

마리아와 마리아론 미학에서의 숭고한 아름다움
마리아론 학자는 patiens divina의 열매입니다. 곧 마리아론이 있으려면 믿음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론을 세워 나가는 데에서 아름다움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믿음의 체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곧 강생하신 말씀이시며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체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그분께 가능한 유일한 아름다움은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 그리스도교 문화를 관통해 온 사상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형상으로, 숭고함은 힘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아름다움은 참된 것과의 관계를 북돋우고, 숭고함은 선한 것과의 관계를 북돋웁니다. 믿음을 기리는 그리스도교 도상, 특히 마리아 도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아름다움은,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과 견주어 볼 때 고유한 함의를 지닙니다. 그것은 분명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리스도교 예술은 고전 예술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추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의 감정이 아니라 숭고함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두 예술의 미학적 성격 사이의 이 근본적인 차이야말로, 우리가 비잔티움 예술의 특징적인 면모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로막는 주된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전히 서술에 그치는 우리의 판단은 문제의 밑바탕을 소홀히 하며, 칭찬할 만한 경우에도 진솔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예술의 여러 요소, 이를테면 장식적 경향이나 꾸밈의 회화적 매력, 또는 비물질화를 향한 추구를 파악하고 서술할 수는 있지만, 그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세우거나 그것들이 자발적인 감정에서 솟아나는 표현을 지닌 어떤 예술적 이상의 필연적 귀결임을 보여 주지는 결코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숭고라는 미학적 범주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범주에서 솟아나는 감정과는 다른 감정입니다. 숭고함의 감정은 모든 그리스도교 예술의 원천입니다. 장소와 시대의 조건에 따라, 한 민족의 심리와 영적 경향에 따라, 이 예술은 그때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양식과 표현을 찾아내었습니다.
하느님의 강생을 그 바탕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도상에서는, 아름다움이 하느님의 인간화를 부각시키는 반면 숭고함은 인간의 신성화를 부각시키는 듯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상대적인 범주로 나타나며, 그 상호 보완성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의 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 결합을 눈에 보이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두 범주는 동기와 존립을 같은 원천에서 받습니다. 곧 강생하신 말씀,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분(갈라 4,4), 아버지의 얼굴과 말씀을 드러내시는 분에게서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얼굴은 온전히 아버지를 향해 있고,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도 언제나 아드님으로 머무르신 그 아드님에 대한 당신의 흡족함을 그분 위에 쏟아부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6-17).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신 아드님의 충격적인 현존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아름다움과 이콘은 온갖 우상 숭배적 타락에서 벗어나 고유한 정당성을 얻을 뿐 아니라, 마침내 특별한 성사적 의미까지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세상의 연약한 현실 안에 하느님께서 강생하신 신비에 대한 거의 가장 효과적이고 신뢰할 만한 증언이 됩니다. 하느님의 많은 이름 가운데 말씀의 몸 안에 가장 구체적으로 강생한 이름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시몬 베유처럼 대담하고 불안한 사상가는 자신을 특징짓는 철저함으로, 눈부신 신비적 직관을 통하여 문제의 핵심을 포착하였습니다:
“세상에 아름다움이 현존한다는 것은 강생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적 증거이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이 아름다움의 형태로 이 세상에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께서 물질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내시는 다정한 미소이다. 그분께서는 우주의 아름다움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
강생의 신비에서 솟아나는 이콘적 얼굴의 본질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 사랑의 참된 현현으로 드러나며,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으로 온 창조의 변모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이르는 길, 세 위격의 찬란한 빛에 이르는 길, 지지 않는 빛에 이르는 고행의 길입니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이콘과 만날 때, 은총으로 밝아진 생각은 영광을 향하여 열리고, 변모된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의 장막을 찢고, 말씀일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의 이콘이시며 당신 영광을 완성하는 끝까지 사랑하심(요한 13,1)의 선물을 주신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뵙기에 이릅니다. 강생은 영광의 광대한 순환을 움직이게 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타보르 산에서 변모하시어 시원이자 이미 종말인 근원적 아름다움을 빛나게 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움이 우리의 자유를 해방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사랑의 태양이 빛나고, 그분의 눈은 빛과 지혜와 힘의 빛살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마음 안에 믿음의 응답을 일깨웁니다. 이 가느다란 사랑의 실에 매인 채, 온전한 자유 안에서, 그분의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저 변모시키는 빛살에 꿰뚫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변모시키는 사랑의 이 마리아론적 바탕은 삼위일체적 사랑의 깊은 관계를 이끄는 바탕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을 완성하시는 성령께서는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대상이시며 동시에 그 기관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는 미학주의적 축소를 훨씬 넘어서는 실재입니다. 아드님의 아름다움은 분명한 기원의 원천, 곧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며, 이는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이 관계 안에 주님 탄생 예고 때 마리아의 친밀함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빛은 특권적인 길을 따르지 않고, 정화된 마음의 영원한 진리를 향한 고행의 길을 따릅니다. 오직 정화된 마음만이 신성의 형언할 수 없는 빛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정화된 사람의 선에서 뿜어 나오는 바로 그 빛, 수많은 성경 인물의 얼굴을 비추고, 고행 성인들의 삶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이콘의 거룩한 얼굴을 밝히는 후광으로 확인되는 그 빛나는 빛입니다. 은총의 내적인 빛, 성령을 모신 인격의 빛이며, 마리아 안에서 그 놀라운 본보기를 지닙니다.
Theotokos의 아름다움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성령의 보이는 현존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분을 낳으실 그분께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지니셔야 했습니다. 동방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머니께는 성령의 현존에서 비롯하는, 피조물에게 가능한 이 존재론적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말씀의 어머니 안에 있는 생명의 숨결은 이 땅에 그 충만함을 그려 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의 마지막 영광은 세상 종말에 앞서 한 피조된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eschaton입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마리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하시려면,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ater를 참조하십시오. 이 회칙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신비에 가장 가까이 계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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