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채우는 낮추심, 비워지신 그리스도와 가난한 이들의 잔치

글: Prof. Dr. Daniel C. Afonso · 업데이트
Humiliavit semetipsum factus obediens 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
필리 2,8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전례는 서두르는 독서라면 서로 무관하다고 여길 두 본문을 나란히 놓습니다. 한편에는 필리 2,5-11의 그리스도 찬가, 곧 말씀의 내려오심과 들어 높여지심의 노래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루카 14,15-24의 큰 잔치에 관한 루카의 비유가 있습니다. 처음 초대받은 이들이 거절한 뒤 집이 가난한 이들로 가득 차는 이야기입니다. 그 둘 사이에서 시편 21(22)이 다리가 되어 주는데, 주의 깊게 기도하는 이라면 누구도 잊지 못할 한 구절, Edent pauperes, et saturabuntur (시편 21,27), 곧 가난한 이들이 먹고 배불리리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나란히 놓인 세 독서가 아니라, 세 시제로 변화하는 하나의 신학적 문법입니다. 자신을 비우신 분이 바로 집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배부름은 한 분의 낮추심의 열매입니다.
I. 내려오심의 찬가, 자기 비움과 들어 높여지심
필리피서의 찬가는 교회가 간직한 가장 오래된 노래로 된 그리스도론입니다. 바오로는 이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인용하며, 도덕적 명령으로 그것을 소개합니다. Hoc enim sentite in vobis, quod et in Christo Jesu (필리 2,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지니십시오. sentite로 옮겨진 그리스어 동사 phroneîte는 스쳐 가는 감정이 아니라 습관적인 사고, 영혼 깊이 뿌리내린 성향을 가리킵니다. 어떤 교의보다 앞서, 이 찬가는 권고입니다. 말씀의 내려오심을 관상하는 것은 그 안에서 자기 존재 방식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이 움직임에는 내려가는 세 계단과 올라가는 세 계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cum in forma Dei esset (필리 2,6),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rapina, 곧 탐욕스럽게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rapinam이라는 말은 결정적입니다. 그분은 당연한 권리로 지니신 것에 매달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semetipsum exinanivit (필리 2,7),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리스어 ekénōsen은 신학에 케노시스라는 용어를 주었으며, 교부들은 그 안에서 신성의 상실이 아니라 육신 아래 영광이 가려짐을 보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이 비움이 신적인 것의 감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의 더해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려오심으로써 하느님이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내려오시는 하느님이 되십니다. 내려오심의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 (필리 2,8),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곧 종과 저주받은 자에게 마련된 형벌입니다.
그제야 찬가는 방향을 뒤집습니다. Propter quod et Deus exaltavit illum (필리 2,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들어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omne genu flectatur (필리 2,10), 모든 무릎이 꿇게 하려는 것입니다. 들어 높여지심은 낮추심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을 씌워 줍니다. 위로 오르는 길은 정확히 가장 낮은 지점을 지나갑니다. 이것이 그날의 복음이 식탁의 이미지로 옮겨 낼 숨은 법칙입니다.
II. 거절된 잔치와 가득 차는 집
이 비유는 식탁에서 나온 한 행복 선언에서 비롯됩니다.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하나가 외칩니다. Beatus qui manducabit panem in regno Dei (루카 14,15), 하느님 나라에서 빵을 먹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한 이의 안이한 경건함을 허무는 이야기로 답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건한 한숨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응답을 요구하는 구체적 초대입니다. Homo quidam fecit coenam magnam, et vocavit multos (루카 14,1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이를 초대하였다.
거절은 세 가지이며, 이 셋은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는 밭을 샀고, 다른 하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으며, 셋째는 장가를 들었습니다. 땅의 소유, 일의 도구, 혼인의 유대입니다. 어느 동기도 그 자체로 죄는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이 비유의 독이 있습니다. 잔치의 문을 닫는 것은 명백한 악이 아니라 절대화된 눈앞의 선, 곧 필요한 단 하나의 것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해 버린 좋은 것입니다. 본문은 모두가 coeperunt simul omnes excusare (루카 14,18),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핑계는 거절의 예의 바른 방식입니다.
주인의 응답에는 두 물결이 있습니다. 먼저 고을 안의 사람들, pauperes, ac debiles, et caecos, et claudos (루카 14,21), 곧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로, 율법이 제단에서 배제하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다음, 아직 자리가 남았기에 길과 울타리 쪽의 사람들입니다. compelle intrare, ut impleatur domus mea (루카 14,23),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폭력적인 해석에 맞서, 이 compelle에서 칼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설득하는 은총의 부드러운 힘을 보았습니다. 집은 스스로 합당하다고 여기던 이들이 아니라, 문 앞에서 내보일 것이 아무것도 없던 이들로 가득 찹니다.
III. 낮추심의 유일한 논리
두 독서는 서로 반대되는 길로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필리피서는 마지막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루카는 식탁의 첫자리로 올라가는 꼴찌들을 보여 줍니다. 공통의 축은 뒤바뀜입니다. 한편에는 Humiliavit semetipsum, 다른 편에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introduc huc가 있습니다. 루카의 잔치는 먼저 자신을 비우신 한 손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가득 차며, 필리피서의 비움은 합당하지 않은 이들과 나누는 식탁으로 끝날 때에만 의미를 지닙니다.
시편 21(22)은 이 일치를 들리게 하는 경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새기신 바로 그 수난의 시편이 뜻밖에도 잔치로 이어집니다. Edent pauperes, et saturabuntur (시편 21,27). 버림받은 이의 외침에서 굶주린 이들의 배부름이 솟아납니다. 필리피서의 십자가와 루카의 만찬은 이 시편에서 이음매를 찾습니다. 낮추심의 경륜과 잔치의 경륜이라는 두 경륜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입니다. 잔치는 완결된 낮추심의 영광스러운 얼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빵에는 그것을 내어 주는 십자가의 맛이 배어 있습니다.
IV. 비워진 여종이자 식탁의 첫 사람이신 마리아
어느 독서도 동정 마리아를 부르지 않지만, 그분은 두 독서를 여는 열쇠이십니다. 케노시스의 찬가는 자신을 비우시는 아드님을 묘사하는데, 그 비움에는 세상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으니, 스스로 ancilla Domini (루카 1,38), 곧 주님의 종이라고 말한 한 여종의 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필리 2,7에서 취하시는 forma servi는 마리아께서 이미 당신 자신에 대해 고백하시던 처지를 메아리칩니다. 그분은 케노시스를 밖에서 모방하시는 것이 아니라, 케노시스가 시작되는 인간적 자리이십니다. 하느님과 같음을 rapina로 여기지 않으신 말씀께서는, 자기 것을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 자기 몸을 선물을 위한 빈 공간으로 만드신 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Magnificat는 두 독서를 함께 앞당겨 풀이한 주석입니다. 마리아께서 exaltavit humiles와 esurientes implevit bonis (루카 1,52-53), 곧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노래하실 때, 그분은 이미 필리피서가 아드님께, 루카가 잔치의 가난한 이들에게 적용할 법칙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필리 2,9의 낮추어진 이의 들어 높여지심과 시편 21,27의 가난한 이들의 배부름은 둘 다 어머니의 노래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뒤바뀜의 증인일 뿐 아니라 그 예언자이자 첫 열매이십니다.
그러므로 옛 신앙은 그분을 가득 차는 집에 이미 들어간 분으로 봅니다. 자기 의로움을 믿던 이들이 식탁을 거절하자, 그분은 하느님께 대한 굶주림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이날 마리아를 관상하는 것은 다른 것을 말하는 본문에 마리아적 장식을 덧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가난한 이들의 식탁이 단 하나의 인간적 이름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보는 일이며, 그 이름은 주님의 집이 가득 차도록 자신을 비운 여종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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