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날개 아래, 신의 갑옷과 헤로데의 여우

«Nemo nostrum sibi vivit»: Paulo, a ovelha perdida e Maria

글: · 업데이트

예루살렘, 예루살렘, 네가 선지자들을 죽이고 보내는 돌을 던지니, 왜 내 자식들을 모으고자 하는 내 소원을 듣지 않는가? (루카 13,34)

제30주 일반 시간 예배는 우리의 눈에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이미지를 제시하지만, 신앙은 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합니다. 한 편으로는 사도가 신의 갑옷으로 충성스러운 이를 무장시키고 어둠의 권세들과 싸우게 합니다. 다른 편으로는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결단력 있게 걸어가서, 예언자들을 죽이는 도시를 애도하며, 그 위에 새끼를 품는 새의 몸짓을 펼치십니다. 에페소서 6장 10-20절과 루카 복음서 13장 31-35절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문체로 같은 전투와 같은 자비를 묘사합니다. 정의로 무장한 전사이자 새가 새끼들을 품는 것은 구원의 신비 하나의 표현으로, 보호하면서도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I. 인간이 아닌 갑옷

서신의 첫 부분은 신실한 이에게 힘의 원천이 되지 않는 강함을 촉구합니다. “주님과 그분의 힘에서 강하게 되라” (에페소서 6:10).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강함은 자기 것이 아닌, 참여하는 강함입니다. 바울은 즉시 전투의 전장을 육체에서 영으로 옮깁니다. “우리는 육체와 피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 이 세상의 권세들과 권능들과 장로들과 어둠의 주인들과 영적 악의 기질들과 싸운다” (에페소서 6:12). 기독교의 전투 상대는 형제간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형제들을 무기로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권세입니다. 전투의 장소를 혼동하는 것은 이미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묘사하는 갑옷은 완전히 방어적이며, 단 한 조각 예외가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갑옷,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헬멧, 모든 것을 보호하는 갑옷으로 몸을 방어합니다. 오직 한 가지 무기가 상처를 입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닌 영의 검” (에페소서 6:17)입니다. 기독교인은 자신만의 검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신실한 이는 몸으로 싸우지 않고 진리로만 상처를 입힌다” (강조). 따라서 텍스트는 기도와 간구로 끝납니다. “매 시간 기도와 간구를 통해 기도하라” (에페소서 6:18)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를 부탁합니다. 갑옷은 무릎을 꿇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II.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언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모호한 경고를 받습니다. 몇몇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헤로데가 너를 죽이려 한다” (루카 13:31)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도피가 아닌 여행 계획입니다. “가서 그 악한 영에게 말하라” (루카 13:32)고 하시며, 그분은 악한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오늘과 내일에도 있으니, 세 번째 날에는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성하다” (consummor)라는 동사는 일정의 마무리가 아닌, 부활을 의미합니다.

오늘, 내일, 모레라는 삼일간의 기간은 루카 복음의 길로 향하는 열쇠이며,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헤로데는 교활하지만 왕이 아닌 늑대이며, 늑대는 진정으로 걸어가는 자를 막지 못합니다.

슬픔이 이어집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지 않는다” (루카 13,33)는 말씀처럼, 성스러운 도시는 대신들을 환영하기보다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내가 내 자식들을 모으고자 할 때, 마치 어미 새가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네가 원하지 않았구나” (루카 13,34). 하나님의 원하는 바와 인간의 원하지 않는 바가 충돌합니다. 신의 자비로운 은총은 강요되지 않습니다. 집은 비어 있고, 마지막 말은 미루어진 약속입니다. “내가 오는 날까지 너희가 말하기를, ‘오시어 이름대로 축복받으소서’ 하라” (루카 13,35). 주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축복하는 날까지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III. 보호하는 한 손과 모으는 한 손

두 독서 모두 보호라는 이미지를 공유합니다. 바울은 믿는 자를 악의 날에 견디게 하기 위해 갑옷으로 보호합니다 (에베소 6,13). 루카는 주님이 예루살렘의 자식들을 그 날개 아래 모으고자 하신다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양쪽에서 같은 제스처로 이해됩니다. 갑옷은 믿는 자가 입는 보호이며, 날개는 하나님이 펼치는 보호입니다. 악마로부터 작은 이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오직 하나, 동의입니다.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 6,11). 날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신학적인 핵심입니다. 영적 전투는 영웅적인 단독 행위가 아니라, 은총은 자유를 배제하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갑옷으로 보호하고 모으십니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늑대가 예언자들을 죽인 것은 예루살렘이 날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이 대우받은 자의 집이 폐허가 된다” (사도행전 7,46)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비로운 응답은 그분이 죽임을 당하신 도시에 들어와 최종적인 안식처를 만듭니다. 십자가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펼쳐진 날개입니다.

IV. 날개와 갑옷을 입은 마리아

전통은 날개 달린 새를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읽었고, 마리아론은 그 사랑이 바로 마리아라는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용을 물리치고 날개 달린 큰 독수리의 두 날개 아래 피신하는 여인 (계시록 12,14)을 묘사할 때, 교회는 그 여인이 태양으로 둘러싸인 동시에 보호와 보호자로서의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에베소서 6장의 갑옷은 마리아가 완벽하게 실현합니다. 그녀는 정의의 갑옷을 입은 왜냐하면 그녀는 의로운 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믿음의 방패로, 예루살렘이 거부한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사탄의 화살을 막습니다.

마리아는 오늘의 독서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슬픔에서 주님은 자식들을 날개 아래 모으시고, 십자가 옆에 서 있는 마리아의 그 소원을 이루십니다. 그녀는 예루살렘이 거부한 것을 받아들이는 그 fiat로, 모든 이를 위한 피난처가 됩니다. 그녀를 통해 기도하는 이들은 그녀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습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 (루카 1,28)는 말씀처럼,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이가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보호와 날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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