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집의 고고학

베들레헴의 고고학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탄생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 탄생에 관한 마태오(1-2장)와 루카(2,1-40)의 서술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 자료들에서 탄생 장소는 집과 구유와 동굴로 이야기됩니다. 마태오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그에 따른 이집트로의 피신 이전에 성가정이 살던 집을 언급합니다. 루카는 성가정이 퀴리니우스의 호구 조사 때문에만 베들레헴에 있었고, 손님방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맏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다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묵은 집은 친척들의 집이었고, 바로 그 호구 조사 때문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분명히 호구 조사의 절차를 마치자마자 떠났습니다. 반면 성가정은 적어도 아기의 성전 봉헌과 산모의 정결례 때까지 (마태오가 시사하듯이 요셉이 베들레헴에 다시 거처를 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그 도시에 머물렀고, 동방 박사들의 뜻밖의 방문을 받았으며, 이어서 헤로데의 예기치 않은 박해로 인하여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요셉의 가문이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소식과 일치하는데, 그는 다윗 가문 태생이었습니다. 또한 요한 1,11과 7,5이 증언하는 바와도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혈연으로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곧 “당신 백성”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임신한 상태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미 가난한 그 집에서 가장 변두리의 자리를 그분의 어머니께 해산할 곳으로 내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유에 관한 소식은 루카가 부각시키는데, 그가 거기에서 구약의 두 메시아 예언, 곧 LXX에 따른 이사야 1,3과 하바쿡 3,2의 성취를 보기 때문입니다. 외경이고 전설적인 덧붙임이 없지 않으나 매우 흥미로운 역사 자료인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우리는, 성가정이 호구 조사를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가던 도중 그 중간 지점인 예루살렘에서 다섯째 마일 지점,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의 영토 사이, 라헬의 무덤 근처, 에프라타 지역의 인적 없는 곳에서, 마리아께서 해산할 때가 되셨기 때문에 멈추어야 했다고 읽습니다. 이 해산은 지하에 있고 어두컴컴하다고 묘사된 동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던 다윗 가문 사람들의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그 집의 일부 공간은 자연 동굴을 이용하여 마련되었다고 추론해야 합니다. 팔레스티나의 교부들은 이 자료들을 조화시켰고, 유스티노는 구유를 동굴과 결합하였습니다. 오리게네스도 같은 노선을 따랐습니다. 에우세비오는 베들레헴을 에프라타와 조화시킵니다.
신약성경의 문제들에 익숙한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고고학은 적절한 증거들을 제공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나자렛에서도 그리스도 시대의 가옥 구조에 관하여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 주는 집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오(Viaud) 신부가 발견한 유명한 “기둥머리의 집”은 네 개의 방을 갖추고 있는데, 이 방들은 손님 구역과 집주인 구역을 나누는 중앙 복도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가족의 방과 창고가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작은 현관과 방이 있고, 여기에 화덕과 동물의 외양간으로 쓰이던 동굴이 붙어 있습니다. 분명히 집과 동굴과 구유는 쉽게 동일시되며, 뒤의 두 용어는 이중의 용도를 지닌 자연적 공간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루카는 katályma, 곧 손님방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지 공공 여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관에 대해서는 10,34에서 합당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바로 그 방이 외양간 구실을 하던 동굴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집-동굴-외양간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장소였고, 그들은 그곳에 domus ecclesiae를 세웠습니다. 이 예배는 유스티노가 언급합니다. 그곳은 하드리아누스에 의하여 모독되었는데, 그는 유다교 예배를 뿌리 뽑는 과정에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박해하였고, 그리스도교 신비의 기념 자리에 이교 신비의 기념을 대신 놓았습니다. 그는 베누스의 애곡과 탐무즈-아도니스의 신격화를 기리는 신전을 세우고 거기에 신성한 숲을 덧붙였습니다. 이는 문헌 자료에서 오리게네스와 예로니모와 치릴로가 증언합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 자신이 증언하듯이, 탄생 동굴에 대한 공경은 계속되었습니다. 같은 소식을 에우세비오도 전하는데, 그 장소가 다시 그리스도교화되기도 전이었습니다. 180년간의 모독 끝에 그 장소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되찾아졌습니다. 그는 326년에 자신의 어머니 헬레나(248-329)가 현장을 답사한 뒤, 다각형 앱스를 갖춘 대성전을 세웠는데, 중앙 제대 위에는 발다키노가 있었고, 기둥들이 신랑과 측랑을 나누었으며, 제단부 앞에는 단이 있어 그곳에서 동굴로 내려갈 수 있었고, 동굴의 구유는 값진 재료로 입혀졌습니다. 최고의 영화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그는 529년 사마리아인들의 반란으로 콘스탄티누스 시대 건물들이 입은 피해 뒤에, 대체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성전을 세웠습니다. 입구 모자이크에 자기네 동포인 동방 박사들이 묘사되어 있었던 덕분에 614년 페르시아인들의 파괴를 면하였고, 예언자 Isa Ben Yousuf(요셉의 아들 예수)의 탄생을 공경하는 모스크로 쓰였던 덕분에 엘 하킴의 분노도 피하였으며,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탄크레드에게 슬기롭게 항복함으로써 십자군의 약탈 또한 면하였습니다. 십자군은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탄생 대성전은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는 요새의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들어가는 길은 낮고 작은 문 하나뿐인데, 이교도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을 막으려고 세 개의 정문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나르텍스를 지나 낡은 문 너머로 장엄한 대성전에 들어서면, 붉은빛 석회암으로 된 통돌 기둥이 네 줄로 둘씩 짝지어 늘어서서 측랑과 중앙 신랑을 나누고, 신랑의 높은 벽과 오늘날 드러나 보이는 나무 지붕의 들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동쪽의 성가대석은 높이 자리 잡고 있으며, 6세기의 청동 문이 달린 십자군 시대의 두 출입구로 들어가는 양쪽 계단을 통하여 예수 탄생 동굴로 내려갑니다. 그 동굴 바닥의 한 벽감에는 도금된 은별과 흰 대리석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이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가리킵니다. 다른 벽감에는 바위를 파서 만들고 오늘날 대리석으로 입혀진 구유가 있는데, 그곳에 아기가 뉘어졌습니다. 그곳에 놓으려고 헬레나가 봉헌한 은 구유는 오늘날 로마의 Santa Maria Maggiore에 있습니다. 맞은편 제대는 동방 박사들에게 봉헌되어 있습니다. 바위벽은 가죽과 값진 직물로 덮여 있습니다. 천장에는 쉰세 개의 등이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 탄생 대성전에 북쪽으로 잇닿아 성녀 가타리나 성당(1881년)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있는데,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폐허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녀 가타리나 성당의 오른쪽 측랑에서 계단 하나가 동굴과 무덤 벽감과 지하 통로의 미로로 내려가는데, 이것이 실제로 이 장소를 카타콤바와 비슷하게 만듭니다. 그 가운데에는 384년에 베들레헴에 이르러 그곳에서 Vulgata를 번역한 성 예로니모의 무덤과 그의 제자 파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의 무덤을 품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잠긴 문 하나가 이 복합 시설을 예수 탄생 동굴과 갈라놓습니다.
바가티 신부의 평면도는 그리스도 탄생의 본래 장소들에 관한 이러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해 줍니다. 탄생 제대 아래에는 구유 동굴이 있습니다. 수직으로 내려가면 예수 탄생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12세기에 그리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경사로를 통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성 요셉 제대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 바닥에는 네 개의 무덤이 있고 다른 두 무덤은 아치가 있는 옆 벽감에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신심의 증거로 이 장소에 묻히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면 큰 동굴로 내려가는데, 그곳에는 지하 복합 시설의 본래 입구가 있고 다섯 개의 무덤이 들어 있습니다. 성 요셉 제대에서 바라볼 때 큰 동굴 왼쪽에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동굴이 있으나, 헤로데의 박해로 순교한 어린 순교자들이 여기에 묻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 옆에는 아치 안에 무덤이 있는 또 다른 제대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제대가 있습니다. 큰 동굴 맞은편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아치와 대성전의 콘스탄티누스 시대 기초가 있습니다. 그 너머로는 계단 하나가 12세기의 입구로 이어집니다. 성 요셉 제대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먼저 성 에우세비오와 파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의 동굴이 있고(그 오른쪽에는 바위에 파인 무덤 두 개가 더 있는 샘의 동굴이 있습니다), 이어서 가묘 하나와 지하 무덤 두 개가 있는 성 예로니모의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북쪽으로 성 예로니모의 방과 통하는데, 그 바닥 아래에는 또 두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예수 탄생 동굴 동쪽에는 동방 박사들의 저수조와 물 저장용 동굴이 있습니다. 서쪽에는 여러 무덤이 있는 또 다른 동굴이 있습니다. 예수 탄생 대성전 남동쪽, 프란치스코회 경당 아래에는 젖의 동굴이 있는데, 6세기의 한 전승은 그곳에서 동정 마리아의 젖 몇 방울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동굴의 흰 돌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베들레헴에 이르기 위하여 성가정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오늘날 라마트 라헬 키부츠가 있는 베이트 하케렘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오늘날 정교회 수도원이 있는 마르 엘리아스 언덕 정상에 이르기 조금 전에 한 샘에서 쉬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샘은 오늘날 시멘트 판으로 막혀 있고, 그 위로 수도교의 큰 관이 지나갑니다. 그 자리에는 옛 Kathisma 성당, 곧 동정 마리아께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쉬려고 멈추신 장소의 성당이 세워졌는데, 1992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 공경의 장소는 이집트로 피신하던 성가정의 한 여정과, 아기를 만나러 가던 동방 박사들의 한 멈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헤로데의 궁정을 떠난 뒤 다시 별을 본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 성당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 사이에, 분명히 유베날리스 대주교 시대(422-458년)에 예루살렘의 경건한 여인 이켈리아가 이미 공경하던 유물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나, 그 장소는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신자들의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베들레헴 동쪽 이웃 마을 베이트 사후르에서는 성당들과 수많은 경당이, 밤에 지키고 있다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을 뵌 목자들을 기념합니다. 이 작은 도시 주변에는 목자들의 들판이 있는데, 룻과 나오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경작되고 목초지로 쓰입니다. 여기에서 예로니모는 미카가 언급한 양 떼의 탑을, 목자들에게 알린 바로 그 자리에서 확인하였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예수님 시대의 소박한 목축 취락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알려진 대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곳에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현존에 관한 아주 오래된 증거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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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베들레헴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성찰을 심화하시려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ater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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