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J. 라칭거 [1995])

Papa Bento XVI

Et incarnatus est: 신경의 마리아적 심장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는 신경에서 가장 밀도 높은 문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제프 라칭거(1995)는 이 Et incarnatus est 안에 마리아 신비 전체가 응축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마리아는 말씀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육신의 문입니다.

들어가며

동정 마리아와 말씀의 강생: 라칭거의 신학

니케아 신앙 고백은 고대 교회의 모든 위대한 신앙 고백과 마찬가지로 그 기본 구조에 있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본질적인 내용은, 우리의 생명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우리 주님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사고의 결론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곧 이제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의식하면서 다른 이들 앞에 내놓을 어떤 결론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으로 남으실 것이고, 그분께 의지하려는 모든 시도는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찬 추구일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호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하여 말한다는 사실은 이런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영원에서 시간을 향하여 바라보시며,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대로 그분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분 친히 당신을 규정하셨고, 이제 우리 주님으로서 우리 앞에, 우리 위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의 이 자기 계시, 그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우리 성찰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이 자기 계시야말로 신앙 고백의 중심점을 이룹니다. 인간 역사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 고백의 단순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적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 고백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사람이 되셨나이다”. 우리는 이 구절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늘이, 하느님을 감추던 장막이 찢어지고 그 신비가 곧바로 우리에게 닿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시던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고,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교회 음악의 위대한 대가들은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이 구절에 저 울림을 부여하였습니다. 그 울림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귀와 마음에 닿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신비에 대한 하나의 “주해”이며, 우리의 모든 이성적 해석보다 더 깊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분께서 말씀이시므로,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신”저 원초적이고 창조적인 말씀을 우리의 인간적인 말로 거듭거듭 옮기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 말들 안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1. 신앙 고백문의 문법과 내용

이제 이 문장을 무엇보다 그 문법 구조에 따라 살펴보면, 거기에 네 주어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령과 동정 마리아는 명시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육신이 되셨다“의 ”그분“이라는 주어도 있습니다. 이 그분께서는 먼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이 그분 안에는 – 그분과 떼어 놓을 수 없이 – 또 다른 한 분이 포함되어 계십니다. 곧 성부이십니다. 그분과 같은 본체이시기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라 불리실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이 문장의 첫째가는 참된 주어가 – 앞에서 말한 바에 비추어 예상할 수 있듯이 –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만 세 주체의 삼위일체 안에 계신 하느님이시며, 그럼에도 그 세 분은 한 분이십니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극적인 성격은, 그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행위에 관한 진술을 표명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더 가까이 살펴보면 그 진술은 수난의 선언으로까지 – 곧 수동태로까지 드러납니다. 세 위격께서 –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 참여하시는 이 행위의 진술에 ex Maria virgine라는 표현이 속하며, 더 나아가 전체의 극적인 성격이 바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마리아 없이는 하느님께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이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 고백에서 중요한 것, 곧 하느님께서 당신 홀로 계시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천한 여인, 곧 이름 없는 여인이라고 일컬은 그 여인(루카 1,48)이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분은 그 여인 없이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은 살아 계신 하느님, 곧 행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양도할 수 없이 속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세상의 영원하고 근본적인 의미가 그 육신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분께서는 밖에서 바라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 육신 안에서 활동하는 주체가 되십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동정녀께서 당신 인격 전체를 내어 드려,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자리가 되셔야 했습니다. 강생은 받아들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오직 그렇게 하여서만 로고스와 육신의 일치가 참으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너 없이 너를 구원하려 하지 않으셨다”라고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성자께서 오시는 세상, 그분께서 취하시는 “육신”은 아무 자리, 아무 사물이 아닙니다. 이 세상, 이 육신은 한 인간이며 열린 마음입니다. 히브리서는 시편 40편에서 출발하여 강생의 과정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대화로 해석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성자께서 성부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몸의 마련은 마리아 또한 이렇게 말하는 그만큼 이루어집니다. “희생 제물과 예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 뜻을 이루러 제가 왔습니다” (히브 10,5. 시편 40,6-8). 마리아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드리고 그리하여 자기 몸을 성령의 천막으로 내놓는 그 순간에 성자를 위한 몸이 마련됩니다.

2. 이 문장의 성경적 배경

신앙 고백의 중심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신경을 넘어 그 원천인 성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신앙 고백은 이 대목에서 성자의 강생에 관한 성경의 세 위대한 증언, 곧 마태 1,18-25. 루카 1,26-38. 요한 1,13의 종합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 이 본문들을 세밀하게 해석하는 데까지 들어가지 않은 채 – 하느님의 강생을 이해하는 데에 그 본문들이 저마다 기여하는 바를 어느 정도 붙잡아 보기로 합시다.

2.1. 마태 1,18-25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를 유다계 및 유다계 그리스도인 환경을 위하여 씁니다. 그러므로 그는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데에 관심을 둡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향하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다림과 성취의 내적 유대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여기에서 참으로 활동하신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됩니다. 마태오가 성 요셉에게서 출발하여 유년기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옵니다. 곧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이시며, 다윗 왕조를 이어받아 그것을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왕권으로 변모시키시는 약속된 상속자이심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의 족보는 요셉에게로 이어집니다. 천사는 꿈에 그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말을 건넵니다(마태 1,20).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께 이름을 지어 주는 이가 됩니다. “아들로 삼는 일은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이루어진다” (J. 그닐카, Das MatthäusevangeliumI, Freiburg 1986, 19). 

마태오가 약속과 성취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려 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동정 마리아께서 요셉의 모습 곁에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의심 많은 아하즈 임금에게 하신 약속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적군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아하즈는 하느님께 아무런 표징도 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라 부를 것입니다” (이사 7,14). 그 표징이 아하즈 임금의 역사적 시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였는지, 또 그것이 주어졌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약속은 그 시간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희망의 별처럼 계속 빛나며, 시선을 미래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향하게 합니다. 마태오에게는 동정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심으로써 장막이 걷힙니다. 표징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낳는 동정녀 자신이 바로 그 표징이십니다. 이제 이 둘째 예언의 줄기에 새로운 칭호가 결합되어, 예수님의 이름에 그 온전한 의미와 깊이를 부여합니다. 이사야의 약속에서 출발하여 그 아기가 임마누엘이라 불린다면, 동시에 다윗 약속의 지평도 넓어집니다.

이 아기의 나라는 다윗의 약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 주권의 보편성에 참여합니다. 그 나라 안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 선포는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들에 가서야 다시 나타납니다. 지상 생활 동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과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느끼시며, 아직 세상 민족들에게 파견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뒤 부활하신 분으로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 여기에서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으로 드러나시며, 그분의 새로운 나라는 모든 민족을 포함합니다. 이에 상응하여 마태오는 예수님의 잉태 이야기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한 군데 바꿉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여자(동정녀)가 그를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그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들”은 장차 이루어질 신앙인들의 공동체, 곧 이 이름으로 예수님을 부를 교회를 예고합니다. 마태오의 서술에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은 이를 올바로 이해하여 교회에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약속을 짊어진 인간들 또한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곧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고, 마리아는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요셉은 법에 따른 아버지이고, 마리아는 당신 몸으로 어머니이십니다. 그 여인 덕분에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2.2. 루카 1,26-38

이제 루카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을 서술하는 방식을 살펴봅시다. 이 밀도 높은 본문을 주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에 대한 그 고유한 기여를 붙잡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대목(루카 1,26-38)에 한정하겠습니다. 루카는 천사의 말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비쳐 나오게 하며, 그리하여 그 사건에 저 신학적 중심을 부여합니다. 구원 역사 전체가, 신앙 고백에서도, 바로 그 중심을 향합니다. 태어나실 아기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신 성령께서 신비롭게 그분의 잉태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자에 대하여, 그리고 간접적으로 성부와 성령에 대하여 말합니다. 

마리아 위에 성령께서 내리심을 두고 루카는 여기에서 “그늘을 드리우다”라는 말을 씁니다(35절). 그리하여 그는 만남의 천막 위에 머무르며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던 거룩한 구름에 관한 구약의 역사를 암시합니다. 이렇게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거룩한 천막, 계약의 살아 있는 자리로 특징지어지십니다. 그 여인의 예는 만남의 자리가 되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세상 안으로 받아들여지십니다. 돌로 지은 집에 사시지 않는 하느님께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바쳐진 이 예 안에 사십니다. 세상이 가둘 수 없는 그분께서 한 인간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루카는 새로운 성전, 계약의 참된 궤라는 이 주제를 여러 번 울리게 합니다. 무엇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드리는 인사에서 그러합니다. 기뻐하여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루카가 전하는 천사의 이 말이, 시온의 딸에게 건네지며 그 딸 가운데 하느님께서 머무르심을 알리는 스바니야 3,14의 약속을 다시 취한다는 사실은 이제 거의 만장일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인사로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제시되십니다. 곧 몸소 시온의 딸이시며, 동시에 하느님 현존의 구름이 그 위에 머무르는 거처, 거룩한 천막이십니다. 교회 교부들은 이 생각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다시 초기 그리스도교 도상학까지 결정합니다. 성 요셉은 꽃 핀 지팡이를 통하여 대사제로, 그리스도교 주교의 원형으로 표시됩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께서는 살아 있는 교회이십니다. 그 여인 위에 성령께서 내리시어 그 여인을 하느님의 새로운 성전으로 만드십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은 하느님 신비의 관리자로, 성소의 감독이며 수호자로 제시됩니다. 그 성소는 신부와 그 안에 계신 로고스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신부가 맡겨진 주교의 모상이 됩니다. 신부는 그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하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마리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역사 안에 계신 그분의 “함께 계심”이 특별히 분명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루카의 주님 탄생 예고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점이 우리의 물음에 중요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예”를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권능의 행위만으로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 피조물 안에 당신을 위한 자유로운 대화 상대를 창조하셨고, 이제 그 피조물의 자유를 필요로 하십니다. 외적인 권력이 아니라 자유에 기초하는 당신의 나라가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한 강론에서 하느님과 인류의 이 기다림을 극적으로 그려 냈습니다.

“천사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제 자기를 보내신 분께 돌아갈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 여인이시여, 그 대답을 주십시오. 땅이, 저승이, 참으로 하늘이 기다리는 그 대답을 주십시오. 만민의 임금이시며 주님이신 분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뵙기를 갈망하셨듯이, 그분께서는 당신의 긍정의 대답을 갈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망설이십니까? 어찌하여 두려워하십니까?… 보십시오, 모든 이가 기다리는 분께서 당신 문을 두드리십니다. 아, 그분께서 당신의 망설임 때문에 지나쳐 가신다면… 일어나 달려가 여십시오! 믿음으로 일어나고, 봉헌으로 서두르며, 동의로 여십시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 In laudibus Virginis MatrisHom, IV, 8). 

마리아의 이 자유로운 동의 없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이 예는 온전히 은총입니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는 사실 오직 이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한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가 처음부터 그리고 그에 앞서, 잉태되기도 전에 이미 그를 감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담겨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은총은 자유를 빼앗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창조합니다. 구원의 신비 전체가 이 이야기 안에 현존하며 동정 마리아의 모습 안에 요약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2.3. 요한 복음서의 머리말

이제 요한 복음서의 머리말로 넘어갑시다. 신앙 고백은 그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셨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십니다. 우리는 이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겉보기에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의 저 전대미문의 신적 종합에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교회 교부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그 종합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에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새로움이 있었고 또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 정신에게는 무의미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바는, 오늘날 별다른 성찰 없이 거듭 주장되듯이 어떤 특정한 문화, 예컨대 셈족 문화나 그리스 문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모든 문화 형태에 맞서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에게 그러하였듯이,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그리스인들이나 인도인들에게도, 또한 근대 정신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근대 정신에게 현상 세계와 신적 세계의 이러한 종합은 전혀 비현실적으로 보이며, 근대 합리성의 온갖 자의식과 더불어 거듭 이의가 제기되는 대상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바는 새롭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우리는 믿음 안에서만, 오직 믿음 안에서만 거기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와 삶의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그러나 요한은 매우 독특한 강조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로고스께서 sarx (육신)가 되신다는 문장은 복음서 제6장의 서곡입니다. 제6장 전체가 이 반쪽 구절을 펼쳐 보입니다(R. 슈낙켄부르크, Das JohannesevangeliumI, 243).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세상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줄 빵은(곧 사람의 참된 양식이신 로고스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살”이라는 말은 이미 동시에 희생에 이르는 내어 줌, 십자가의 신비, 그리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파스카 성사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말씀께서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얻으시려고 어떤 식으로든 육신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의 역동이 강생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도 다시 시편의 말씀이 깔려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히브 10,5. 시편 40). 그러므로 이 짧은 문장 안에 복음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 교부들의 말씀이 부르는 울림이 느껴집니다. 로고스께서 응축되시고 작아지셨습니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타당합니다. 무한하신 로고스께서 작아지시어 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말씀, 성경의 온전한 충만도 율법과 예언서가 요약되는 이 한 문장 안으로 응축되었습니다(H. U. 폰 발타사르, Das Wort verdichtet sichin Communio 6 (1977), 397-400). 존재와 역사, 예배와 에토스가 여기 그리스도론적 중심에서 만나 지름길 없이 현존하게 됩니다.

제 마음에 가까운 둘째 지적은 짧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강생의 결과이며 목적으로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심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천막이라는 말을 쓰며, 다시 구약의 만남의 천막과 성전 신학을 가리킵니다. 그 성전 신학은 육신이 되신 로고스 안에서 그 완성을 발견합니다. 천막을 가리키는 데 쓰인 그리스 말 – skené – 안에는 히브리 말 shekînah도 울립니다. 곧 초기 유다교의 거룩한 구름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 뒤에 하느님의 이름이 되었고 “유다인들이 기도하고 율법을 공부하려고 그 곁에 모이던 하느님의 은혜로운 현존”을 가리켰습니다 (R. 슈낙켄부르크, Das JohannesevangeliumI, 245). 예수님께서는 참된 shekînah 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모여 있다면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끝으로 우리는 13절을 한 번 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그분께서는 – 로고스께서는 –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주셨으니, 그들은 혈통에서도 육욕에서도 남자의 욕망에서도 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났다”. 이 구절에는 서로 다른 두 본문 전승이 있으며, 오늘날 어느 것이 본디의 것인지 더는 가려낼 수 없습니다. 둘 다 사실상 같은 시대의 것이며 같은 권위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단수형의 판본이 있습니다. “그분은 혈통에서도, 육욕에서도, 남자의 욕망에서도 나지 않으시고 하느님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 곁에는 라틴 전승이 쓰는 복수형의 판본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났다”. 전승의 이러한 이중 형태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 구절이 어느 경우에나 두 주체 모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사실 언제나 두 본문 전승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직 함께 읽을 때에만 본문의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쓰이는 복수형 판본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로고스에게서 비롯하는 하느님의 새로운 탄생에 참여하는 세례받은 이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 탄생의 신비는 – 우리의 신적 탄생의 원천 – 너무나 밝게 빛나므로 오직 선입견만이 그 상관관계를 부정할 수 있습니다. 설령 단수형 판본을 본디의 것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분을 받아들인 모든 이”와의 관계는 여전히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잉태되심, 곧 그분의 새로운 탄생이 바로 이것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곧 우리를 당신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탄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14절이 로고스의 강생이라는 말로 복음서의 성체 장을 예고하듯이, 여기에서도 제3장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미리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육에서 난 탄생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넉넉하지 않으며 위로부터 오는 새로운 탄생, 곧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태어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3,5). 성령의 활동으로 동정녀에게서 잉태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 새로운 존재 방식의 시작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새로운 시작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사상, 새로운 에토스, 새로운 공동체를 찾는 것 이상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참된 새로운 탄생, 새로운 창조의 근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이렇게 동정 어머니께서 다시 구원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그 여인께서는 당신 존재 전체로 하느님께서 이루신 새로움을 보증하십니다. 그 여인의 역사가 참되고 그것이 시작에 자리할 때에만, 바오로가 하는 말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2코린 5,17).

맺음말: 하느님의 발자취

하느님께서는 돌에 매여 계시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결합되어 계십니다. 마리아의 예는 그분께서 당신 천막을 치실 수 있는 자리를 그분께 열어 드립니다. 그 여인 자신이 천막이 되시고 거룩한 교회의 시작이 되십니다. 그 교회는 다시 새 예루살렘의 선취이며, 거기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거기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받은 이들의 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은, 그러므로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심에 대하여 종교사가 말하고 기다린 모든 것의 영성화이며 정화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심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넘어서는 강생이며 구체화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육신 안에 계시다”.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의 이 풀 수 없는 유대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이룹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거룩하게 여긴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 장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음을 언제나 보증하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나자렛 베들레헴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에서 구속주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장소, 하느님 강생의 신비가 우리를 가까이에서 어루만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이야기와 관련하여, 2세기에 나온 야고보 원복음서는 – 전설적인 요소가 많음에도 실제 기록을 간직하였을 수 있는데 – 이 사건을 두 장소로 나누었습니다. 마리아는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나갔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너는 여인들 가운데에서 복되다.’ 그 여인은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보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여인은 떨면서 집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자주색 실을 집어 의자에 앉아 그것을 자아 늘였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갑자기 그 여인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참으로 전능하신 분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의 말씀으로 잉태할 것이다’” (11,1 이하). 

이 이중 전승에 두 성지가 상응합니다. 곧 샘의 동방 성당과 주님 탄생 예고 동굴을 둘러싸고 세워진 가톨릭 대성당입니다. 둘 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오리게네스는 우물이라는 모티프가 구약 성조들의 역사 전체를 자기 안에 담아 전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강생의 신학과 동정 마리아의 역할을 더 깊이 살펴보려면, 마리아와 강생의 신비를 다룬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ater를 보십시오.

학업을 더 깊이 하십시오: 마리아론마리아 신학성모 발현 그리고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요컨대 Et incarnatus est는 강생의 신비 안에서 마리아의 없어서는 안 될 어머니다운 중개를 강조합니다. Et incarnatus est를 깊이 살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마리아론의 concretum을 관상하는 일입니다. 강생에 대하여 더 읽으려면 Redemptoris Mater를 보십시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마리아론 심화 교육을 원하십니까? Locus Mariologicus의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만나 보십시오. 신학적 엄밀성과 영적 생활, 그리고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을 하나로 잇는 학술 교육입니다.

대기자 명단에 등록하기 →

마리아론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으십니까?

이 글은 Locus Mariologicus 도서관의 저작들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은 학술적 지도와 함께 여러분을 같은 원천으로 이끕니다. 성경, 교회 교부, 교도권, 첫 교의에서 오늘날의 물음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만나보기

Related Articles

Respon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