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 파혼의 드라마

São José: o drama do repúdio

파혼의 드라마: 요셉, 마리아, 그리고 신비에 대한 믿음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파혼의 드라마, Locus Mariologicus

동정녀를 남몰래 떠나보내려던 요셉의 결정은, 어떤 자극에 대한 갑작스러운 응답이나 요구에 대한 반응과도 같은 단발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온전히 이해할 시간조차 갖기 전에 나오는 그런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반응들 가운데 하나도 아니었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이나 모욕당한 자기애의 폭발도, 그러한 상황이 흔히 사람들 안에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중요할수록 그만큼 더 주의를 요구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요셉에게만이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그 문제가 중요하였던, 그것도 매우 중요하였던 그 구체적인 경우에, 요셉은 그 문제에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가볍게 다루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사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명예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문제였습니다. 명예에 관해서라면, 동정녀의 명예는 그가 내린 결심으로 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예를 위하여,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이 나쁜 평판을 얻게 될 가능성이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프게 한 것은 두 번째 측면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하였고, 바로 거기에 갈등의 심각성이 있었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때 찢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거의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그 충동을 거슬러야 한다고 그의 머리가 말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고통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갈등은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그 자체로 그 결정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간은 그 심각성을 덜어 주기는커녕, 생각하면 할수록 덜 분명해 보이는 결단을 점점 더 시급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모든 겉모습으로 보아 마리아는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사실이 아니라고 계속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내에 대하여 그가 본 것과 그가 알고 있던 것 사이의 대조는 당혹과 우유부단을 더 크게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에 동정녀의 침묵이 더해졌습니다. 왜 그분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그는 몇 마디 말을, 어떤 설명을 들을 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분명 잘못을 저지른 여인처럼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여인에게 당연히 있으리라 여겨지는 부끄러움을 그분께서는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눈은 어두워지지 않았고, 그 눈길은 언제나처럼 그토록 순수하고 맑고 평온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따금 그분께서 약간의 연민을 담아 그를 바라보실 때조차 그러하였습니다. 얼굴마저 찡그려져 있지 않았고, 때로는 오히려 환하게 빛나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명백한 것, 이미 다른 설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을 해명해야 하는 껄끄러운 처지에 놓인 이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를 바라보셨고, 그의 고통으로 함께 괴로워하셨으며, 침묵하셨습니다. 그토록 팽팽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기 일을 계속하도록 그분을 도운 그 힘, 그 내밀한 버팀목을 그분께서는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고뇌에 찬 당혹과 상반된 감정의 이 시기가 오래갔는지 짧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 아래, 마리아의 상태와 그분의 설명할 수 없는 침묵과 평온한 태도를 눈앞에 두고, 요셉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얼마 동안 씨름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태 1,20, 곧 요셉이 이런 일들을, 자기가 마련한 해결책을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며 그것이 정말 알맞은 해결책인지 헤아리며 묵상하고 있을 때, 그에게 계시가 내렸습니다. 바로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이 쓰라린 성찰을 거듭한 끝에, 분명한 출구를 비추어 줄 한 줄기 빛도 없이 마침내 어떤 안도를 얻게 되었던 그때였습니다. 해결책은 그가 쉬는 동안, 그가 알아냈던 것과는 다르게 찾아왔고, 그와 함께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보라,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태 1,20)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 아내를 데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혼인한 사이였지만, 혼인의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마리아를 신랑의 집으로 공식적으로 모셔 가는 일도 아직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혼인의 이 두 번째 부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고, 요셉이 바로 그 예측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요인 때문에 이 단계를 두려워하였으리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최악의 경우에도 혼인으로 피하거나 덮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느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알지 못하면서도 예감되는 신비를 더럽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고 혼인 잔치를 치르는 것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그 두려움은 천사가 그를 위대한 신비에 참여시킨 그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에 대한 이 빛은, 말하자면 그를 구원 사업 안으로 공식적으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말로 하자면, “신비로운 깊음의 심연 속에서, 침묵과 비밀 가운데 잉태되고 완성된” 구원입니다. 침묵과 비밀 가운데 동정 마리아께 신비를 알리는 주님 탄생 예고가 있었고,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이 있었습니다. 침묵과 비밀 가운데 요셉은 고뇌에 찬 시련의 날들 동안 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침묵과 비밀 가운데,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그가 알아야 할 것이 전해졌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몫의 근본적인 윤곽이나마 알지 못하고서는,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정하신 사명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그의 의심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강생의 신비를 드러내 주었으며, 그는 자기가 어떤 봉사를 드려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바로 그 순간에 즉시, 그는 무조건적인 신속함과 헌신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그의 아내 마리아께서 천사가 제시한 하느님의 계획에 동의하셨던 그 신속함과 헌신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 마태오의 서술은 이어집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자기 아내를 데려왔다” (마태 1,24). 악몽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낯선 상황에서, 때때로 열병의 헛소리가 우리를 몰아넣는 저 불합리하고 끔찍한 착란처럼 기이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깨어난 것입니다. 또는 어쩌면, 천사의 계시 덕분에 의심과 우유부단에서 벗어나 자기 아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은, 어둡고 어지러운 세계에서 빠져나와 따라가야 할 안전한 길의 분명한 밝음 속에 갑자기 서게 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이런 일들을 묵상하는 동안에 신비의 계시를 받았다는 정황은 의미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에게 그러한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와 동시에 당신 계획을 알게 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랬다면 그분 역시, 모든 문제를 즉시 풀어 줄 수 있었을 그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의무 속에서 요셉의 고통을 지켜보는 번민을 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시각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께서 고통을 겪도록 두셨고, 요셉이 얼마 동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책도 보지 못한 채, 예기치 못한 만큼이나 미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도 없이 번민에 찬 당혹 가운데 씨름하도록 두셨습니다. 그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불완전한 앎의 한계 안에서) 올바른 해결책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개입하고자 하셨습니다.

참된 해결책은 요셉이 그 상황에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자기 능력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때 곧바로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 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그가 알지 못하던 자료들을 그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들과 함께 하나의 준거를 주셨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말하듯, “천사는 요셉을 이사야의 증언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깨어난 뒤에 꿈에서 들은 것을 잊더라도, 그가 늘 자양분을 얻어 온 예언자의 말을 기억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는 아닙니다. 요셉이 마주해야 하였던 번민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모든 사람은 때때로 요셉이 겪은 것과 어떤 유사성을 보이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갈등이든 문제든 뜻밖의 어려움이든, 사람마다 자기 삶에는 자기에게만 관련되지 않는 힘겨운 순간들이 있고, 자기 삶의 행로와 다른 이들의 삶의 행로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받는 상황들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서 사람은 겪어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고통을 살아 내며, 그것은 많은 경우 채택될 해결책의 올바름이 달려 있는 하나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마음과 머리가 서로 어긋나고 사람이 내적인 찢김을 느낄 때, 마음이 강하게 끌어당길 때, 무엇보다 그때에 서둘러 행동하는 것을 피하여야 합니다. 감정이 지배하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 멈추어 서서 성찰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면, 머리는 생각하고 마음에 나아갈 길을 보여 주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문제와 갈등과 반대 앞에서 (삶이 누구에게도 면제해 주지 않는 경험들입니다) 사람의 알맞고 우선적인 응답은 성찰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충동과 마음의 움직임과 본능적이고 성급한 반응을 따라가서는 결코 올바른 해결책에 이르지 못합니다. 무언가 이루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어려움을 더하고 불화를 키우면서 실타래를 한층 더 엉키게 하는 것뿐입니다. 문제가 저절로 풀리기를, 또는 다른 이들이 풀어 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하여 결정할 수 없는 순간과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마주하고 그 결과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미성숙에 얽매인 채 영원히 미성년으로 남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기대는 것인데, 조언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언을 구하는 것은 성공에 이르기에 더없이 합당한 신중의 규칙입니다) 그 짐을 다른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이웃에게 기대는 일은 스스로 그 상황을 헤쳐 나가 알맞은 해결책에 이를 수 있는지를 먼저 가늠해 본 뒤에라야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문제의 성격이 특별한 비밀 유지를 요구하지 않을 때에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최선의 해결책을 위하여 마땅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이의 의견과 조언을 구하는 것이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끝으로, 요셉조차도 자신의 고독한 갈등을 혼자서 풀지 않았고, 천사의 도움으로 그 조언을 따르며 풀었습니다.

요셉에게 찾아온 해결책, 곧 위로부터 온 그 빛은, 그가 씨름하고 있던 바로 그 고독의 상황 안에서 아주 단순하게, 조심스럽게, 침묵 가운데, 거슬리는 외적이고 감각적인 윤곽 없이 그에게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 밖에서 그에게 왔고, 그가 내린 선택이 아무리 논리적이었다 하더라도 옳지 않았음을 그에게 보여 주었으며, 요셉은 즉시 자기 결정을 바로잡아 생각을 바꾸고 천사가 그에게 드러내 준 사실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잊지 맙시다. 성 요셉은 결코 사실에 대하여 성찰하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참된 지혜를 이루는 저 하느님 업적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를 더 깊이 알아보시려면,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Redemptoris Mater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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