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받은 이들과 생명에 봉사하시는 마리아

서론
우리 시대의 가장 강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서로 의존하면서 세계의 존속을 보장하는 여러 요소의 균형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해체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며, 인간도 그 원인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는 더 넓은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곧 생명의 가치입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행위로 그 우주적이고 시간적인 모든 가치가 실현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잃어버린 존엄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런데 죄라는 이 해체의 요소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교회의 기도가 헤아리는 바입니다. 곧 교회는 신앙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며, 멀리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무엇보다 먼저 그 메시지를 실천하기에 알맞은 때에 날마다 잠깁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생명의 의미는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힘차게 재확인됩니다. 그분께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은 분이시라는 사실(히브 13,8)은 성찬 제정 이야기 다음에 오는 환호에서 고백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죽음을 기리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러므로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 공동체는 구원의 신비, 곧 mirabilia Dei, 사건들과 인물들을 관상하며, 그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마리아와 피조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생명과 우주를 위하여 수행하시는 봉사는 매우 다면적이어서 여러 측면을 헤아려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측면들은 “지혜의 옥좌이신 동정 마리아” 미사의 본기도 본문을 성찰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본문을 옮깁니다:

빛의 아버지, 타락한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으키시려고 동정 마리아를 지혜의 옥좌로 뽑으셨으니, 그분의 어머니다운 도우심으로 저희가 저희 한계를 깊이 의식하게 하시어, 교만에 끌려가지 않고 아버지 마음에 드는 겸손으로 아버지를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이 기도문 본문에서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 관찰의 노선을 발견하는데, 이 노선들은 전체로서 마리아께서 생명과 우주와 관련하여 수행하시는 역할의 실제 무게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겠으며, 그 가운데 처음 네 부분은 이 기도에서 발견되는 그만큼의 측면들을 제목으로 삼을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복되신 동정녀께서 생명의 첫째가는 가장 위대한 증진자라는 당신 존재 안에서 지니시는 중요성을 전체적으로 결산해 보려 합니다.
타락한 인류
매우 현실적인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서 생명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드러남은 여러 가지이지만 원인은 하나입니다. 폭력, 굶주림, 비참, 두려움과 같은 드러남들은 인류에게서 그 근본 특징인 존엄을 빼앗았습니다. 여러 장소와 여러 시대를 가로질러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은 죄입니다. 죄가 어떻게, 얼마나 해체의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알기 위하여 신학책이나 사회학책을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접촉하며 살아가기에 그것을 확인합니다.
기원과 타락
그러므로 헤아려야 할 첫째 요소는 타락한 인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합니까? 창세기의 첫 장들은 활동하시는 하느님, 혼돈에 질서를 세우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곧 근본 특성인 좋음을 지닌 우주입니다(창세기 1,25). 이 좋음은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든 생물로 가득하고 우주의 순환과 자연 현상으로 조절되는 환경 자체가, 당신 모습과 당신과 비슷하게 지어진 그 피조물인 인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창세기 1,26). 여기에서 좋음은 그 강도가 커집니다(창세기 1,31).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기쁘게 바라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당신 마음 안에서 그 피조물을 큰 영광으로 정해 두셨으니, 이제부터 그를 당신의 협력자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으로 선포되며, 하느님과 그리고 우주와 이루는 이중의 조화 안에서 살도록 힘씁니다. 창세기 1장의 첫째 창조 이야기에서 이미 그러한 조화를 알아볼 수 있으며, 그것은 28절(“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에서 두 계기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생식, 곧 생명을 이어 가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미래를 주고자 하십니다. 둘째로, 땅을 다스림은 파괴의 목적이나 의도에서 벗어나 기본 필요를 위하여 땅을 사용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인간이,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온 피조물이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올린다는 사실에도 있으니,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참으로 크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낙원, 곧 지상 낙원입니다. 그 동산은 기쁨의 자리이며, 그 정점은 바로 조화,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티 없고 그늘 없는 사랑입니다(참조: 창세기 2,28). 인간은 알몸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창세기 2,25). 그는 아무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도 마음과 생각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평에서 무엇인가가 위협하며 망가뜨립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참조: 창세기 3,5).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조화가 아니라 횡포이고, 맑음이 아니라 두려움과 거짓입니다. 뱀이 제시하는 하느님의 모습 자체가 참되고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심의 언어로 그려진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분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을 내어 주심으로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권능과 다스리심도 사랑의 표지 아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부추김을 받은 인간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죄를 지으면서, 그것을 선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라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악한 자가 내놓는 제안의 핵심이 있으며, 그것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인간이 온 우주와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죄의 결과
이제 성경의 지면을 잠시 접어 두고 세상의 지면을 펼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간다”라거나 “바닥에 이르렀다”와 같은 표현이 드물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 약해져 주인에서 폭군으로 바뀐 인간이 자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 세상과 환경에 대한 조바심과 애정 상실의 표시입니다. 물론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거스르는 온갖 행태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 행태들은 생명을 더 이상 기술·과학 진보의 성과로 섬기거나 추구해야 할 목표나 목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실험의 터전으로 여깁니다. 강한 인간학적 성격을 지닌 교도직을 이어 가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Evangelium Vitæ(1995)에서 인류가 동시에 희생자이며 공범인 도덕적 붕괴의 뿌리를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장 심각한 점은, 예를 들어 정치와 의학이 인간 생명을 보살피고 지키는 자기 직무를 포기하고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고귀한 기예의 왜곡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씁니다:
많은 나라의 법률이, 어쩌면 자국 헌법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나면서까지, 생명을 거스르는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지 않거나 심지어 그 완전한 합법성을 인정하려 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도덕적 붕괴의 우려스러운 징후인 동시에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원인입니다. 한때 모두가 한결같이 범죄로 여기고 공통된 도덕 감각이 배척하던 선택들이 조금씩 사회적으로 존중받게 됩니다. 소명에 따라 인간 생명의 수호와 돌봄에 봉사하도록 정해진 의학마저 그 일부 분야에서 인간을 거스르는 이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데에 점점 더 널리 나서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기 자신과 모순되며 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존엄을 떨어뜨립니다.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는 교황청립 국제 마리아 아카데미(PAMI)의 최근 문헌 주님의 어머니. 기억, 현존, 희망이 있는데, 이 문헌은 세상의 이 우려스러운 상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두 영역을 효과적으로 짚어 냈습니다. 첫째 영역은 생태 영역으로, 여러 결과 가운데 사막화와 화재와 오염이 지적됩니다. 반면 둘째 영역인 사회·윤리 영역은 오히려 구체적 현실에 더 직접적으로 닿아 있으니, 폭력과 착취, 반인간적 목적을 위한 도구화에 내맡겨지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 밑바탕에는 분명히 그릇된 자유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곧 실재가 본디 지향하는 모든 형이상학적·초월적 전개에서 벗겨지고 분리된 자유입니다.
이 문헌에 앞서,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210차 총회(1995)를 마치면서 마리아의 종 수도회는 보편 교회를 위한 자신의 기여를 작성하였고, 그 제목은 뜻깊게도 Magnificat의 종들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상당한 부분이 생명이라는 주제에, 또한 안타깝게도 생명의 해체를 조장하는 그 여러 가지 불안한 측면들에 할애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마리아론적 관점에서 전개되었습니다. SdM이 제시하는 서술은 문체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성경적 형상들과 더불어 교회의 충실하고 기도하며 살아 있는 전통이 끊임없이 다시 성찰하는 요소들이 풍부합니다. 예를 들어 (묵시 6)에서 실마리를 얻어, 흰 말과 나머지 세 말(붉은 말, 검은 말, 푸르스름한 말) 사이의 싸움이 그려지며, 이 말들에는 인류를 괴롭히는 네 가지 악, 곧 굶주림과 전쟁과 범죄적 불의와 생태 파괴가 연결됩니다. 이 드러남들은 저마다 찢김을 일으킵니다. 굶주림이 가장 큰 피해를 일으키고, 그다음이 생태 파괴인데, 이는 “절대적 인간중심주의의 결과”라고 적절히 규정되었으며, 생태 문제를 지극히 시급한 것으로 제기하여 피조물의 좋음을 주의 깊게 헤아리게 해 주었습니다. 두 문헌의 공통된 특징은, 우주의 쇠퇴와 인류의 쇠퇴가 서로를 불러오는 요소이며, 인간이 땅에 대한 자기 다스림을 행사해야 하는 한계를 정확히 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기록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생태 문제가 현대 신학의 몇몇 흐름과 대표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논의됩니다. 그들의 입장 전체에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배 주장을 축소하고 재조정하는 데에 일치가 있으며,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우주 안에도 생명이 현존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한계에 대한 깊은 의식
지금까지 말한 바에 따르면, 죄는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나 어두운 실재로 나타나며, 무엇보다 먼저 그 죄를 짓는 이를 해칩니다. 그러나 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의식하는 것은 이미 변화를 향한 첫걸음입니다(참조: 1요한 1,8-9). 이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말하는 이른바 “내적 참회”이며, 오랜 신학적·영성적 전통의 열매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두 방향에서 도움을 받습니다. 하나는 죄가 인간관계의 영역에 가져오는 결과들이고, 둘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독특한 여정인데, 그분께서는 자기 처지를 의식하는 저 인류의 온전한 한 부분이십니다. 이 요소들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위협받는 요소들의 회복
첫째 지점과 관련하여, 신학 영역에서 원인이 되는 원죄와 그로부터 비롯된 원죄라는 개념의 구분은 이미 알려져 있으며, 이는 우리 조상의 불순종에 적용됩니다. 이 측면에 관하여 교본과 단행본에서 많은 글이 쓰였습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최초의 불순종에서부터, 그리고 그 불순종을 통하여, 인류 내부의 분열과 인류와 온 우주 사이의 분열은, 흔히 쓰는 친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기름 얼룩처럼” 점점 넓어졌습니다. 창세기 3,11-13에 나오는 조상들의 변명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시도들이 한 역사의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 역사는 처음, 창조 뒤에는 목가적이고 완전히 친교적이었으나, 이제 뱀에게 굴복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인 뒤에는 죄로 물들고 개인주의의 산물인 저 균열들을 드러냅니다. 바벨 탑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건들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창세기 4-11장에서 만나는 파괴(홍수)와 흩어짐(바벨)은, 하느님께서 우상 숭배에 이끌린 인간의 행위를 멈추게 하시는 저 도구로 이미 드러납니다.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은 환상과 눈멂의 힘을 지닌 채 계속됩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대리자, 곧 그분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저 피조물의 수호자라는 의식을 되찾는다면 그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친교를 없애 버릴 때, 인간은 자기의 온갖 나약함과 유한함을 드러내는데, 그것들은 자유를 내세우는 겉치레로 가려지거나 어떻든 감추어져 있었으나, 그 겉치레는 실제로 자기 안의 가장 나쁜 부분에 대한 노예살이입니다. 성경의 서술로 돌아가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주도만이 전환을 가져오고, 비록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인류를 우상 숭배의 정체 상태에서 해방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친교의 사명이 맡겨집니다. 늙은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시어 후손을 약속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게 하는 많은 나이에도 그러합니다. 뒷날 그리스도교 전통이 그리스도의 예표로 여긴 아들 이사악은 그 탄생으로만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라는 역할로도 새로움을 나타냅니다. 왜 이 모든 것입니까? 분명히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구원의 예표이지만, 그것이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준비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분명한 초자연적 뜻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다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지만, 구원에 대한 갈망 또한 깊이 새겨져 있으니, 이는 세상의 참된 제작 인장이며 창조주에게서 온 본래의 인장입니다”. 그러므로 죄보다 더 큰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며, 성 바오로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넘쳤습니다”(로마 5,20)라고 강조하면서 그 하느님의 전령이 됩니다. 몇 세기 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De Civitate Dei에서 이 논제로 돌아와, 악보다 더 큰 본래의 선을 말하며, 그 선 덕분에 인간이 “저희의 빚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한계를 의식하게 하면서도 절망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하느님의 호의로 표시된 우주와 생명의 온전한 한 부분임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 우주에서는 지은이께로 올라갈 수 있으니, 우주는 하느님께서 당신 흔적을 남기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인류에 속하시고 그 안에 완전히 통합되어 계신 분이 바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동정 마리아
그런데 드러내 놓고 그리스도교적인 종교 담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복음을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로 읽더라도,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마리아께서 끊임없이 당신 자신과, 하느님 및 생명과 맺으신 관계를 의식하신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께서 특별한 사명으로 정해진 피조물이시라면, 신자가 아닌 이들이나 곧바로 신앙의 담론에 기대지 않는 이들에게 마리아께서는 더 단순하게, 찾고 물음을 던지는 한 사람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분께서도 신앙의 순례자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분께서도 계시와 생명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던지십니다(참조: 루카 1,29). SdM 63항에서 마리아께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모든 것이 요약되고 모든 것이 이야기되는 독특한 단편”으로 나타나신다면, 이는 존재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행위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작에 일어난 일과 하나의 평행을 이룹니다. 이는 유일하신 그리스도에게서(참조: 1티모 2,5-6) 모든 사람에게로 퍼지는 저 중개이며, 우리가 마리아 안에서 우주의 수호자, 곧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그분의 구원 메시지를 지닌 이들이라는 우리 과제를 읽어 내게 해 줍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참조: 묵시 21,5)을 모시고 다니시며 당신 자신을 의식하시는 마리아를 본받아, 우리의 한계뿐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인성 안에 심어 두신 빛의 씨앗에 관한 성찰의 여정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죄의 해로운 결과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사보다 조금만 못하게 창조되어 영광과 존귀로 꾸며진 인간(참조: 시편 8,6)이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능동적이고 구체적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PAMI 문헌의 말이 매우 시의적절하게 들립니다. 그 문헌에 따르면 “근대의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을 대신하여 새로운 모델이 들어서는데, 그 구성 요소는 관계성과 연대성, 상승효과와 상호 보완성입니다. 이 요소들은 자연의 질서를 반영하며 복음의 가르침과 완전히 어울립니다”. 이 바탕에서 세상 안 인간 활동의 새로운 의미가 힘을 얻고, 모든 학문이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우주와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자기 봉사를 바칠 수 있습니다. PAMI 문헌이 언급한 요소들이 실천된다면 죄의 영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요소들이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오기에 그분과 우리의 친교와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우월성을 굳건히 해 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합니다. 이는 마리아론 담론에서 두 층위로 분명한 전개를 가집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를 친교의 피조물로, 또 계시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의 대답을 온전히 보여 주시는 분으로 헤아리는 것이며, 동시에 마리아론이 신학의 다른 부문들과의 대화에 더욱더 열려야 할 필요성입니다. 이 마리아론적 노선을 이어 가면, 그 우월성은 봉사로 이해되며, Magnificat이 표현하는 복음의 서술에 깊이 밀착해 있습니다. 거기에서 마리아께서는 자유롭고 교회적인 신앙 행위로(구약의 유산을 요약하고 완성하는 교회성으로), 그러나 무엇보다 그 대상에 의하여 규정되는 신앙 행위로 말씀을 받아들이신 뒤, 겸손과 드높여짐이라는 두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성을 하나로 묶고 드러내십니다. (루카 1,48)을 주의 깊게 읽으면, 드높여짐이 종의 겸손을 거쳐 온다는 것과, 다시 그 겸손이 드높여짐 안에서 그 관을 받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그 드높여짐은 앞의 구절들이 표현하는 기쁨의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보잘것없음과 무능함이 결실 없음이나 쓸모없음을 뜻하지 않는다(참조: 시편 30,8 [LXX]. 창세기 29,32)”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신비가 당신을 이해받고 사랑받게 하시려고 인간에게 주시는 “열쇠”입니다. 겸손을 통하여, 그리고 당신을 겸손하다고 밝히시며(참조: 마태 11,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계시의 충만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례로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그분을 닮게 되는 것과 그의 두 번째 탄생은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대로의 복되신 동정녀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곧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 겸손을 굽어보신 피조물이십니다. 실제로 세례는 소중히 여겨야 할 마리아론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 전통과 서방 전통 모두 그 특징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신자들이 세례의 은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서방에서는 특히 대 레오 교황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와 동정녀이신 교회에게서 태어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모범 관계를 강조합니다.
교만에 끌려가지 않기
인간의 연약함은 그 위에 작용하는 힘들이 집요할수록 더욱 손에 잡히듯 분명해집니다. 인간의 타락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그 부정적인 힘들, 그 유혹들을 자기실현의 요소로 여기고 그 결과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교만이 태어나는데, G. 마르셀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듯이, 교만은 자기에 대한 배려를 지나치게 부풀려, 나 아닌 다른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저 열림을 우리에게서 빼앗습니다. 여기에 인간과 그리스도인에게 닿는 근본 물음이 자리 잡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태 재앙의 기원입니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읽고 듣는 바에서 출발하는 성찰로 이 새로운 부분을 시작합시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생태 재앙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자주 받아 왔으며, 이는 (창세기 1,28)에 대한 그릇되고 피상적인 독서와 해석에서 옵니다. 오늘날 그러한 비난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재앙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주와 하느님의 분리에 이바지한 과학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에 돌려야 한다고 곧바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사물을 받아 그것을 관상하고 마치 지금 그분의 손에서 나오는 것처럼 대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근본 임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곧 그분의 일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의 표현을 바로잡아 말해야 할 바는 이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주의 무분별한 착취와 거기에서 비롯된 온갖 비극적 불균형을 조장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인간을 신적인 분과 절대자에게 이어 주는 현상인 종교성을 나쁘게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한 왜곡은 여러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속주의, 효율주의, 기술주의가 그것인데, 이것들은 인간과 우주를 격하시키고, 자기 안에서 신적인 분의 발자취를 보는 저 능력을 크게 흐리게 하였습니다.
피조물을 향한 새롭고 관상적인 시선
그러나 이 지점에 이르러, 우주를 관상하려면 어떤 신비주의가 필요합니까? 물론 동방의 규범을 떠올리게 하는 양식을 따르면서 몇몇 요청과 실마리와 제안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 신앙에 속하지 않는 주제들을 끌어들여 때로는 미묘하고 때로는 뚜렷한 혼합주의로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입니다. 가능한 첫째 길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바로 앞서 말한 그 길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성경이 나타내는 길이 놓여 있으니, 성경은 피조물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거울이 되고 그 앞에서 묵상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우리는 창조 사건을 다시 읽어 낸 적지 않은 본문을 만나며,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지혜적 배경과 차원을 지닌 본문입니다. 그러한 본문 가운데 고전은 (잠언 8,22-31)으로, 이는 창조주 하느님을 기리는 데로 이끌 뿐 아니라 인간과의 유비를 재확인합니다. 절 구분을 지키며 본문을 옮깁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으셨다
당신 활동의 시작에,
그 옛날 당신의 모든 일에 앞서.
영원으로부터 나는 세워졌다,
처음부터, 땅의 기원으로부터.
심연이 없었을 때 나는 태어났고
물이 가득한 샘들이 아직 없었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산들의 밑바탕이 자리 잡히기 전에,
언덕들에 앞서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아직 땅과 들판을 만들지 않으셨을 때,
세상의 첫 흙덩이들도 만들지 않으셨을 때.
그분께서 하늘을 굳게 세우실 때 나는 거기 있었다.
심연 위에 둘레를 그으실 때.
높은 곳에 구름을 엉기게 하실 때,
심연의 샘들을 굳게 하실 때.
바다에 그 한계를 정하시어,
물이 그 기슭을 넘지 못하게 하실 때.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그때 나는 건축가로서 그분과 함께 있었고
날마다 그분의 기쁨이었으며,
언제나 그분 앞에서 즐거워하였다.
땅덩이 위에서 즐거워하며,
사람의 아들들 사이에 나의 기쁨을 두었다.
여기에서 지혜는 다행스럽게도 사람과 같은 의인화된 특징으로 제시되며, 이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관상하고 친교의 정신으로 그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곧 자기 한계를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의식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창조한 사랑의 신비 안에 놓여 있음을 의식하며 그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인간에게 열릴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위한 풍요로운 출발점입니다. 신적인 분과 맺는 결속의 상태로 이해되는 이 종교적 관점에 서서, 동시에 자주 자기가 일으키거나 촉발한 불균형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볼 때, 인간은 정말로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 자문하게 만드는 불안의 상태에 사로잡힙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겸손
신학에서도 철학에서도 두루 쓰이는 겸손 개념을 잘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 humus(흙)에서 유래한다고 여긴다면, 겸손이 다름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서 취해진 기원의 모성적 자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곧 옛 아담과 새 아담, 다시 말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두 경우 모두 동정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동정성과 이어져 있으며, 동정성은 참된 거룩함의 형태로서, 어떤 식으로든 부패시키고 어둡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분리가 소외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새로운 제사를 이루시며 세상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몸을 지님의 중요성을 뜻깊은 말로 강조합니다(참조: 히브 10,5-10). 이는, 무신론적 사고에서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 그리하여 비워지고 가난해지는 인간의 표지라고 여겨지는 소외 대신에, 거룩함-분리는 만남과 참여를 가리키며 마침내 생명의 승리를 선포하기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여 움직이시어, 인간이 드높여지도록 그의 지상 실존과 그 존재의 밀도를 취하십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기원의 자리인 흙과 맺는 관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헤아리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 되며, 그 관계 안에서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근본적인 역할을 차지하십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이는 그 순수함과 죄 없음에도 우리 인성과의 관계를 없애지 않는 인성입니다. 우리 인성은 죄에 물들어 있고 Mysterium iniquitatis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지만, 그분의 인성은 오히려 Mater misericordiæ이시며 Refugium peccatorum이신 당신 존재 안에서 규정됩니다. 이 두 호칭은 교회의 lex orandi에 속하며, 자비와 더불어 단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화해에 알맞은 행위로 이루어진, 더 굳세고 튼튼한 그리스도인 삶을 지향하는 lex credendi를 드러냅니다. 마리아께서 실행하신 것은 자비의 어머니다운 행위이며, 그에 앞서 그분과 인류 사이의 끊임없는 일치의 행위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르마노스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강론 가운데 하나에서 복되신 동정녀의 안식을 말하며, 하느님의 어머니 편에서 인간을 버리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그분께서 온 인류를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는 점을 바로 강조합니다. 자비의 현존, 곧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늘과 땅 사이의 화해를 돕는 현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께서 완전함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SdM 108항에 나오는 호칭 기도의 칭호 Virgo inviolata를 되찾아 주의 깊게 헤아리는 일은 충분히 정당하고 타당해 보입니다. 마리아를 피조물과 이으면서도, 이는 우리가 그 폭력의 부재를 땅의 본래 상태로 돌아감이며 그 상태를 실제로 되찾음으로 보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가면 씀이 아니라, 아무런 변형 없이 자기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피조물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하여 처음에 지어 주신 그대로를 드러내는 자연스러움입니다.
묵시 12장: 언제나 유효한 제안
Virgo Inviolata는 사람들이 폭력이나 착취의 폭력적 사고를 거부하도록 초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테면 실천적 기억으로서 기원의 조화로운 상황을 다시 중심에 놓는 일입니다. 이는 상상 속의 “황금시대”를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과 비슷하게 지어진 인간의 존엄에 더 알맞은 환경을 위하여 행동하기 위해서입니다. (묵시 12)의 성경 본문을 헤아리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태양을 입은 여인은, H.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적절한 표현에 따르면 “온전히 마리아적인 교회”의 상이며, 하느님의 빛에 잠겨 있어, 무질서와 악만을 낳을 수 있는 붉은 용과 맞섭니다(참조: 묵시 12,4). 위협받는 여인의 두 차례 도피 또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그것은 자기 책임에서 물러남이 아니라, 교회에게 생명을 위한 끊임없는 싸움이라는 자기 처지를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가 되고자 합니다. 이 싸움은 악에 악으로 되갚는 폭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로 이어 갈 수 있습니다. (묵시 12)의 가장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여인이 인류 자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옛 이스라엘과 새 시대의 교회는 증언의 노력 안에서 그 인류의 온전하고 가장 좋은 부분이며, 인류는 용의 위협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가 마침내 여러 험난한 여정에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영광의 운명을 이룹니다. 인간은 자유로이 선택합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이데올로기의 복합체와 광범위한 파괴의 체계와 규범으로 균형을 계속 어지럽히는 묵시록의 용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Virgo Inviolata를 바라볼 것인지,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부르신 그 영광을 깨달을 것인지입니다. 파괴나 익명의 운명이 아니라 생명 가치의 회복입니다. 오직 생명을 통하여서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그 권능에 참여하고 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묵시 12)의 본문이 강하게 암시하는 파스카 신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위한 헌신이며, 생명이 승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계획 안에 주님의 어머니께서 자리하십니다. 겸손하고 동정인 땅이신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돌아올 수 없는 길에서 벗어날 빛과, 뻔뻔하고 광란에 찬 광고와 폭력의 매력과 유행에 굴하지 않을 힘을 가리켜 보이십니다. 피조물의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와 나란히, 그리고 성령께 빚어지신 마리아께서는 생명이 고요히 넘치는 기원의 동정의 땅으로 나타나시며(참조: 창세기 1,24), 동시에 죽음에 대한, 그리고 생명과 인간에게 싸움을 거는 그 숱한 악의 드러남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마지막 실재를 나타내십니다(참조: 묵시 12,17).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지혜, 인간을 위한 기준
1992년의 한 연설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인간학적 계획이 절대적 완전함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뿌리에, 곧 마리아의 태 안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잉태와 훼손되지 않은 무덤에서 결정적 생명으로 태어나심에는, 그분의 존재와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모범과 관련하여 큰 의미를 지닌 「동정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리아를 “자기 온전함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피조물 앞에 놓인 거울”로 관상하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는 자연의 목소리를 통하여 땅에서 올라오는 평화의 요청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SdM이 마리아와 우주의 관계에 관한 논의를 맺는 말은 뜻깊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부패를 겪지 않으셨다. 훼손과 오염은 그분께 낯선 것이었다”. Tota pulchra es Maria. 이 문장은 비록 인상적이기는 해도 단순한 호칭 기도의 칭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상태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자신의 주님의 거룩한 변모에 관한 강론에서 말하듯, 인간이 본디 소우주여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본질의 결속을 자기 안에 지닐 정도라면, 완전한 인성의 표지이신 마리아의 현존은 기원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거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사물의 좋음이 그 조화의 힘으로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는데, 이는 온 피조물이 자기를 완성하는 télos, 곧 하느님 자신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논의를 이어 가면서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통치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과 같은 본질이신 외아들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그리고 그 인성을 통하여 온 피조물의 일치가 이루어져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며, 아름다움에 관하여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이 현대인에게 말하도록 하는 신학적 미학을 세우면서 그 요청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피조물의 아름다움
피조물과 신성의 이 일치가 영원하시고 같은 본질이신 아드님의 위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면, 이로써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유행이나 지나가는 취향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피조물을 취하시는 언어가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언어를 말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과 비슷하게 지어져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저 진리와 선과 일치와 아름다움을 품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전체로서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을 신자로서도 피조물로서도 완성합니다. PAMI는 자기 문헌에서 이를 되울렸으며,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바오로 6세가 묵시록의 여인 상을 통하여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바로 강조하던 바를 다시 받아들여 깊이 있게 전개하였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문헌이 또한 말하듯이, 아름다움의 길이 “사목적 도구”에서 “신학 연구의 도구”라는 범주로 넘어갔다면, 마리아론적 성찰은 결코 장애나 편견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길을 크게 도왔습니다. “Tota pulchra께서는, 문헌이 말하듯,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지극히 긴밀한 접촉 안에 계시며, 그 아름다움을 풍성히 받으시고 그것으로 온전히 빚어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다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우주 위에 퍼뜨리시고, 찬미와 감사의 노래로 변모시켜 그것이 나온 원천으로 되돌려 보내십니다”. 이 모든 것은 G. 팔라마스의 안식에 관한 강론에 나옵니다. 테살로니카의 위대한 수도승이며 주교인 그는 동정녀를 인간과 신이라는 두 세계 사이의 중간 자리에 두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창조된 본성과 창조되지 않은 본성 사이의 경계이시며, 그분에게서 신적 광채로 비추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시니 그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 45,6)”. 물론 이 본문에서 교회적 차원을 알아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적 차원보다 앞서는 자리, 곧 마리아께서 차지하시는 vertex creationis의 자리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께서는 분명히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예”를 나타내시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밖에서 발음하시는 “예”가 아니라, 마리아께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신 저 피조물을 취하시고 고귀하게 하시면서 하시는 “예”이며, 마침내 그 피조물의 점진적 theosis 과정을 승인하기에 이릅니다.
마리아의 역할
여기에서 어느 정도 시급하게 다가오는 근본 물음이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를 주님의 종으로, 곧 그분 자신께서 생명과 우주에 봉사하도록 세우신 분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대답은 다시 한번 성경에서, 특별히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참조: 요한 2,1-12).
카나로 돌아감
먼저 이렇게 말합시다. 이 이야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관심거리가 있습니다. 서로 이어진 요소와 상징과 표징의 총체, 마리아 특유의 협력하는 태도, 그리고 중심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쇄신과 완성의 전망 안에서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이 관심거리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상호 연결 안에서 살아 있으며 그 의미를 찾습니다. 본문에 깔려 있는 상징에 관하여는 A. 세라가 숫자 6, 곧 물독의 수가 지니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아주 잘 밝혀냈습니다. 그 물독들은 “토라가 계시된 세상의 여섯 시대를 나타냅니다. 각 물독이 숫자 6, 곧 전체를 이루므로, 모세 율법의 각 시대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는 충만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과 행위로 함께 계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 앞서 계시된 것을 완성하시고 그것을 당신 위격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역사 안에 나타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전체를 나타내십니다. 여기에서 둘째 요소, 곧 물이 포도주로 바뀜도 나옵니다. 토라, 곧 구약을 대신하여 새 법, 곧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새 계약의 법이 들어서며, 이 계약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으로 맺어지고 이루어집니다(참조: 묵시 21,5).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실행하시는 이 모든 계획에 마리아께서는 말없이 협력하시며, 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곧 잔치의 성공을 해칠 그 정황을 알아보시는 데 그치십니다. 이는 더없이 조심스러운 태도이며, 또한 생명의 승리를 기리는 혼인과 같은 사건에 기쁘게 참여하시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첫 기적으로 세상과 역사 안에 새기기 시작하시는 것이 바로 그 승리입니다. 그분과 함께 생명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가치가 시간 안으로 들어온다면, 마리아께서는 그 은혜를 가장 먼저 입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 가치의 첫 증진자가 되십니다. “마리아의 행복은 바로 하느님의 신비를 당신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당신의 협력으로 그 신비를 작용하게 하시는 능력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포도주가 더 없음을 알아채시는, 깊은 조심성과 어우러진 그분의 세심함은 놀랍지 않으며, 또한 그분께서 그리스도께 맡기시어 그분에게서 새로움을 받게 하심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 새로움이란 그분께서 당신 포도주로 하느님으로서 온 인류의 신랑으로 다시 당신을 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뀜은, 우리가 알듯이 온갖 악과 불균형으로 상처 입은 세상의 분위기를 기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도 세상은 언제나 하느님의 피조물로 남아 있으며, 변모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역사와 피조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지나가 버리거나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순수한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벌이고자 하시는 자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으뜸가는 잔치는 파스카이니, 인간과 피조물이 다시 하느님의 영광으로 입혀지는 사건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이미 그 영광에 참여하고 계시니, 예고를 받으시고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녀(참조: 루카 1,28)이시며 하늘에 오르신 동정녀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 은총의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진” 피조물이신 그분을 바라볼 수 있으며, 같은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도록 초대받습니다.
신앙과 증언
무엇보다 먼저 신앙의 주제입니다. 11절은 그리스도의 드러나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거기에는 “제자들이 그분을 믿었다”는 사실이 따라옵니다. 참된 봉사를 향한 첫걸음은 신앙입니다. 곧 사람들을 자기를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시려고 거저 종이 되시는 하느님의 제안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힘입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카나의 기적을 지켜본 이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신앙 곁에,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는, 생명의 실제 증진을 향한 일관된 증언이 있습니다. 물론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찬미와 공경은 일관된 처신과 떨어지거나 고립될 수 없으며, 언제나 lex orandi, lex credendi, lex vivendi의 순환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순환 안에서, 옛 폐허를 다시 세우러 오신 분의 위대하심을 믿을 만하게 만드는 봉사에 유익한 요소들의 상승효과가 이루어집니다(참조: 이사야 61,1-2 그리고 루카 4,16-21). 이 모든 것은 묵시록의 용이 지닌 힘보다 더 큰 힘으로 되찾은 생명이며, 되찾아 소중히 여겨진 생명으로서 잔치로 이끕니다. 그 잔치는 사람들과 우주가 그 기원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조화와 친교를 기릴 때에만 참된 잔치이며, 기리면서 일관된 선택으로 끊임없이 살아갈 때에만 그러합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은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하지도, 슬퍼하거나 근심하지도 않고(참조: 마태 9,15) 잔치를 벌입니다. 그 잔치는 무질서하고 시끄러운 도취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그것을 풍성히 주시는 분을 다시 만나는 기쁨입니다(참조: 요한 10,10). 생명의 지은이께서 계시지 않을 때, 곧 그분께서 사람의 자리를 제한하실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으로 그분을 한구석에 밀어 놓을 때, 오래지 않아 오류와 불투명함과 미완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생명의 의미를 잃으면, 생명을 업신여기도록 부추기는 모델들을 얻어 받아들이게 되고, 그 모델들은 이미 말한 대로 하느님과 우주를 크게 거스르는 행위와 손잡습니다.
결론
“악을 소름 끼치도록 싫어하고 선을 굳게 잡으십시오”(로마 12,9). 로마 공동체를 향한 성 바오로의 절박한 초대는 공간과 시간을 넘어 그 신선함 그대로 우리에게 다다릅니다. “악을 소름 끼치도록 싫어하십시오”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이 악은 크든 작든 낱낱의 죄만이 아니라, 겉으로는 더 무해해 보이는 방식으로 인류 고유의 한계이며 미완성입니다. 그 한계에서 멀어짐은 평범함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자기실현을 가져다준다며 제시되지만 머지않아 환상으로 드러나는 그 도식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섬은 자라고 또 자라게 함을 뜻합니다. 여기에 마리아에 관한 담론의 설득력이 자리 잡습니다. “그분은 그 「문화」가 그토록 “한 인간을 가꿈”이어서, 그에 관한 그분의 체험이 오직 하느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와 하나가 된 여인이십니다”. “선을 굳게 잡으십시오”는 바오로의 권고의 둘째 부분이며, 이는 “한 인간을 가꿈”이라는 적절한 표현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봉사가 지닌 두 방향을 우리에게 가리켜 줍니다. 곧 인간을 향하여,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세상을 향하여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봉사, 따라서 생명에 대한 봉사이며, 더 나아가 생명의 지은이께 대한 봉사입니다. 곧 친교로 이루어진 결속, 인류의 지고선이시며 생명의 참된 원천이시고 언제나 현재성 안에서 드러나는 새로움의 표징이신 분께 대한 결속입니다. “선을 굳게 잡으십시오”. 이는 정적인 선이 아니라, 우리를 선을 행하도록 떠미시고 인간을 자신과 이웃과 우주를 위한 선행의 주역이 되게 하시는 한 위격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장 뚜렷하게는 카나의 이야기에서, 새 하와이시며 첫 번째로 구원받으신 마리아께서는 인간을 하느님께 이끄시어, 인간이 변모와 생명의 기쁜 증진에서 하느님과 협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생명의 잔치는 신앙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문제를 위한 빛으로 우리 앞에 서시는 방식은 동시에 현존이며 모범이고, 생명이며 부활이신 하느님 사랑의 문화를 오늘 현존하게 하려고 그분과 협력하라는 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기 있고 낙관적이지만 피상적이지는 않은 태도가 요구됩니다. 곧 피조물의 긍정성과 아름다움에서 다시 시작하여 그것을 통하여 본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는 얼굴과 이름이 있으니,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가 되는 나자렛의 예수이십니다(참조: 2코린 1,20). 구원과 생명,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문화에 대한 “예”입니다. 마침내 생명의 증진과 존중을 말하는 모든 태도가 그 안에서 빚어지는 힘찬 “예”입니다. 여기에 마리아께서 온전한 권리로 들어오시며, 바로 그 지향의 수렴으로 인간에게 모범이 되시어,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이 자신의 매우 개인적인 문체로 “물질의 반짝이는 보석, 우주의 진주이며 육화하신 인격적 절대자와 이어지는 그 접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만물의 모후이시며 어머니…”라고 묘사한 저 위대함을 취하십니다. 매혹적이며, 원한다면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전망이지만, 우리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굳건히 하는 데에는 그 파격적인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창조주의 협력자이며 우주의 수호자라는 자신의 독특한 소명을 일깨워 줍니다.
교회와 세례받은 이들의 삶에 마리아께서 바치시는 봉사를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도록, 바오로 6세의 교황 권고 Marialis Cultus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봉사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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