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 credit in me: 마리아와 세상을 비추는 믿음

글: Prof. Dr. Daniel C. Afonso · 업데이트
Qui credit in me, non credit in me sed in eum qui misit me.
요한 12,44
“나를 믿는 이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요한 12,44의 이 단언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철저히 신중심적인 관점에 놓습니다. 성자를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을 보내신 성부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무리 독특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께 바치는 신심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류를 당신께로 다시 이끄시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 대한 결합입니다. 마리아론은 이 관점에서 그 근본 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합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전형적으로 신중심적이었고, 그분께서는 당신이 잉태하신 아드님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I. 관계로서의 믿음: 단지 “…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을” 믿는 것
“…을 믿다”에 해당하는 요한 복음의 그리스 말은 pisteuein eis, 곧 문자 그대로 “…안으로 믿다”이며, 이는 어떤 명제에 대한 단순한 지성적 동의를 넘어서는 구문입니다. 요한적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움직임이며, 존재 전체가 관여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의 “들어감”입니다. “…안으로”를 뜻하는 이 eis의 용법은 요한 복음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믿음의 신비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곧 단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요한 12,44-46은 이 믿음을 빛의 문맥 안에 놓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것이며, 이는 성자께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존적 변화를 묘사하고자 요한이 사용하는 우주론적 은유입니다. 믿는 이는 단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달라집니다. 곧 안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빛의 인도를 받습니다.
조명으로서의 믿음이라는 이 차원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 안에서 깊은 반향을 지닙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두운 밤”은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피상적인 애착과 감상주의와 안락함인 모든 것에서 믿음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정화된 믿음이야말로, 그분께서 부재하신 듯 보일 때에도, 빛이 어둠이 되고 위로가 메마름이 되었을 때에도, 예수님 “안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전통 안에서 마리아는 정화된 믿음의 모범이십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fiat”라고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 부재하신 듯한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 곁에 머무르신 그분께서는, 신비 신학이 “벌거벗은 믿음”이라고 일컫는 것을 사셨습니다. 곧 성자께서 가져다주시는 위안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지니신 신적 정체성 때문에 그분께 결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믿으신 그분의 믿음은 십자가의 어둠을 흔들림 없이 통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은 그분을 “믿음의 동정녀”라고 부릅니다. 쉬운 믿음이 아니라 시련을 거친 믿음의 동정녀이십니다.
II. “너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믿음의 삼위일체적 차원
요한 12,44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성부를 믿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성자께 대한 믿음은 그분을 보내신 분께 대한 믿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단언은 명확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을 성부에게서 분리된 자율적 신성으로 향하지 않고, 성자를 성자로서, 곧 성부와 맺으시는 본질 구성적 관계 안에서 향합니다. 파견(“나를 보내신”)이 이 관계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에게서 오시고, 성부를 드러내시며, 성부께로 이끄십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이 점을 circumincessio 또는 perichoresis의 원리로 정식화하였습니다. 세 신적 위격께서는 서로 “안에” 사시며, 이 존재와 사랑의 상호 침투가 곧 삼위일체 내적 생명입니다. 성자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이는 동시에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조적으로 삼위일체적입니다. 예수님께 결합하는 데에서 시작하지만, 점진적으로 성부를 드러내고 성령의 내주에서 그 정점에 이릅니다.
마리아론 전통은 이 논리에서 출발하여 마리아와 삼위일체의 관계를 탐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부의 딸”, “성자의 어머니”, “성령의 궁전”이시며, 이 칭호들은 프란치스코회 전통이, 그리고 그 뒤 근대 마리아 영성이 큰 결실을 맺으며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삼중의 관계는 인위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삼위일체 신앙의 논리에서 비롯합니다. 성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삼위일체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는 참된 신심 논고에서,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삼위일체적 생명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상을 전개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 신적 위격들을 대신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요한적 믿음을, 곧 예수님 “안으로” 믿고 그분을 보내신 성부를 믿는 그 믿음을 가장 충만하게 실현하신 피조물로서, 그 같은 길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따르는 것은 삼위일체적 생명 “안으로” 가장 완전하게 걸어가신 피조물을 따르는 것입니다.
III. 반사된 “세상의 빛”이신 마리아
요한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다”. 당신 자신이 빛이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나 마리아 도상학과 찬가는 빛의 은유로 마리아를 기립니다. “Stella Maris”(바다의 별), 태양에 앞서는 “새벽”,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입니다. 이 모든 칭호는 성자에게서 오는, 파생되고 반사된 빛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빛이 아니시고,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시어 왜곡 없이 세상에 반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구별은 신학적으로 결정적입니다. 마리아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원천도 은총의 원천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가장 완전한 거울이시니, 그 빛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이셨고 그러므로 가장 완전하게 인류에게 반사하시는 피조물이십니다. 그분의 전구, 그분의 영적 모성, 교회 안에서의 그분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중개와 나란히 놓이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빛의 반영입니다.
새벽은 희망의 성경적 이미지입니다. “새벽”(히브리 말로 shachar)은 어둠이 빛에 자리를 내어 주고 새날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동틀 무렵에 바치는 아침 기도는 바로 이 건너감을 청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빛이 새날을 비추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전례 전통 안에서 마리아는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에 앞서 오시어 그분을 알리는 “새벽”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마리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충만한 빛에 앞서 새벽이 빛났습니다.
참된 마리아 신심은 언제나 이 구조를 지닙니다. 곧 빛을 향한 신심이며, 새벽에 멈추어 서지 않는 신심입니다. “바다의 별이시여, 기뻐하소서”라고 말하는 이는 그 별이 인도하는 항구를 가리킵니다. “Stella Maris”라고 말하는 이는 그 별이 목적지가 아니라 안내자임을 인정합니다. 건강한 마리아론은 결코 성자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마리아론이며, 마리아를 “믿으신 분”(루카 1,45)으로, 그러므로 성부께로 이끄는 믿음의 가장 좋은 안내자로 관상하는 마리아론입니다.
IV. 마리아의 믿음과 구원의 “지금”
요한 12,46-47: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구원의 사명이지 단죄의 사명이 아닙니다. 이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가장 빛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께서는 구원하러 오셨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비추러 오셨지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통 안에서 마리아는 성자의 사명이 지닌 이 자비로운 차원과 결부됩니다. Mater Misericordiae, 곧 자비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그분의 자비로운 사명에 참여하신다는 직관을 반영합니다. 성자 곁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전구하시는 그분께서는 엄한 재판관의 “팔을 비트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구원하러 오신 성자의 사명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Stabat Mater와 Salve Regina에 대한 중세의 신심은 이 직관을 하나의 흐름을 이룰 만큼 강한 정서적 힘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곁에서 성자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고, 성자와 함께 전구하시며, 성자와 함께 구원하십니다. Salve Regina는 그분을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희망”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들은 올바로 이해하면 신심의 과장이 아니라 성자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시는 분으로 마리아를 믿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요한 12,44-46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결부시키는 믿음의 조명은 피조물의 질서 안에서 마리아 안에 가장 충만한 표현을 지닙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성령의 조명을 받으시고(“성령께서 너에게 내리실 것이다”, 루카 1,35), 온 생애를 이 빛의 인도를 받으며 사셨으며, 이제는 부활하신 성자의 영광에 참여하시는 그분께서는 가장 충만하게 조명을 받은 피조물이십니다. 교회가 기도 중에 “저희 어둠을 밝혀 주소서” 하고 청하는 믿음은 마리아 안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약속을 발견합니다. 한 인간 피조물이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에게서 온전히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존재를 다하여 성자 “안으로” 믿으신 마리아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로 이끌고 성령의 밝음 안에 사는 조명된 믿음의 모범이십니다.
참고 문헌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참된 신심 논고, 45-50항.
- 요한 바오로 2세, Redemptoris Mater, 12-19항 (1987).
- R. 슈낙켄부르크,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제2권 (1980).
- A. 세라, 마리아의 지혜와 관상 (1990).
- H. U. 폰 발타사르, Maria für heute (1987).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마리아론 심화 교육을 원하십니까? Locus Mariologicus의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만나보세요 – 신학적 엄밀성과 영성 생활과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을 하나로 잇는 학문적 교육 과정입니다.
마리아론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으십니까?
이 글은 Locus Mariologicus 도서관의 장서에서 비롯합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은 학문적 지도와 함께 여러분을 같은 원천으로 이끕니다. 곧 성경, 교부, 교도권이며, 첫 교의에서 현대의 물음들에 이르기까지입니다.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