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 vidit me vidit patrem: 마리아와 보이는 하느님의 얼굴

글: Prof. Dr. Daniel C. Afonso · 업데이트
Qui vidit me, vidit Patrem.
요한 14,9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요한 14,8), 예수님께서는 요한 그리스도론 전체를 요약하는 이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주해”(요한 1,18), 곧 아버지의 충만하고 결정적인 계시이십니다. 예수님을 뵙는 것은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이는 신적 위격들이 서로 혼동되기 때문이 아니라, 아드님께서 아버지를 너무도 온전히 드러내시어 아드님을 뵙는 것이 아버지를 뵙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론은 여기에서 탁월한 성찰의 지점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팔 안에서, 십자가 곁에서, 다락방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드님을 “보신” 그분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육신 안에서 가장 깊이 “아버지를 뵌” 분이십니다.
I. “아버지의 주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가시성
요한 1,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 품 안에 계신 외아드님, 바로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그리스 말 동사는 exegesato이며, 여기에서 “주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드님께서 아버지를 “해석하셨고”, “이야기하셨으며”, “알려 주셨습니다”. 이 “주해”는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 모든 몸짓, 모든 말씀, 모든 침묵이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계시 “이신” 분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서 추상적이고 알 수 없으며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보이게 되신 하느님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 생애의 각 장면은 아버지의 얼굴의 한 측면을 드러냅니다. 병자들의 치유는 아버지의 연민을 드러내고, 죄인들의 용서는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며, 부활은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그분의 행위 안에서 뵙는 것은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심을 뵙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이 가시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에 여러 결과를 가져옵니다. 복음의 관상은 단지 역사적 기억의 훈련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탁월한 길입니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고 예수님의 몸짓과 말씀에 감동되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이는 아버지를 뵙습니다. lectio divina, 곧 성경의 기도하는 독서는 바로 이러한 훈련입니다. 아버지의 “주해”이신 예수님께서 신자의 마음을 점차 비추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2세기에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이 원리를 놀라운 간결함으로 정식화하였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척도이시고, 아버지는 아드님의 척도이시다”. 이 순환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지니는 유일한 “척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척도이며,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지니는 유일한 “척도”는 아버지께서 부활로 확증하시는 척도입니다. 예수님을 뵙는 것은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드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친밀하게 아드님을 “보신” 마리아께서는 아버지와 아드님의 이 상호 가시성에 유일한 방식으로 참여하셨습니다.
II. 마리아의 “바라봄”: 관상과 가까움
모든 인간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가장 많이 “보신” 분이십니다.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팔에 안긴 그분을 보셨습니다. 나자렛에서 삼십 년의 숨은 생활 동안 자라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카나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부활하신 그분을 가장 먼저 뵌 분이십니다. 이 “봄”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상적인 것입니다. 표면 너머로 꿰뚫고 들어가 더 깊은 실재를 파악하는 사랑의 시선입니다.
루카 2,19.5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이 “되새김”(symbalousa, 문자 그대로 “모으다, 합치다, 서로 관련짓다”)은 마리아께서 아드님을 “보신” 방식에 대한 묘사입니다.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요소들을 모으고 사건들을 서로 관련지으며 그것들을 이어 주는 깊은 일치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관상적 훈련이 바로 교부들이 theoria, 곧 관상적 봄이라고 부른 것이며, 수도 전통이 기도의 탁월한 방법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도상 전통은 마리아의 이 “봄”을 Mater Amabilis의 이미지나 겸손의 성모 이미지 안에서 특별히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팔에 안긴 아드님을 사랑과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그 시선은 모성적 애정만이 아니라 영적 경이를 드러냅니다.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친밀하게 아드님을 “보신” 그분께서는 신비에 “익숙해지지” 않으셨고, 언제나 놀라워하는 이의 태도,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이루신 일을 늘 새로운 경탄으로 관상하는 이의 태도에 머무르셨습니다.
아드님 앞에서의 이 경탄의 능력은 동시에 아드님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아버지 앞에서의 경탄이며, 영성 전통이 성모 신심을 통하여 전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마리아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의 관상은 우리의 시선을 교육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빚어냅니다. 그분의 “봄”은 우리의 “봄”을 이끕니다.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를 뵌 그분께서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를 뵙도록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III.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 부성적이고 모성적인 사랑의 인내
요한 14,9: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냐?” 필립보에게 던지신 예수님의 이 물음에는 잔잔한 슬픔의 음조가 있습니다. 가까움이 앎을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의 온 공생활 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지만 그분께서 누구이신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물리적 가까움은 그 자체로 영적 앎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확인은 마리아의 고유함을 밝혀 줍니다. 그분께서는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계셨을 뿐 아니라, 탄생 이전부터 당신의 온 시선을 이끈 모성적 사랑으로 유일한 방식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가까움은 물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감적이고 영적이며 존재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머니로서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이는 곧 가까운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앎으로 그분을 “안으로부터” 아셨다는 뜻입니다.
모성적 사랑은 신학 전통에서 특별한 인식론적 깊이를 지닙니다. 어머니는 다른 어떤 앎도 이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녀를 “압니다”. 자기 태중에 그를 형성하고 자기 젖으로 기르며 자라는 것을 지켜본 어머니는 개념적인 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그를 압니다. 마리아와 하느님의 아드님의 관계로 옮겨 놓을 때, 이 “모성적 앎”은 다른 어떤 인간의 것도 넘어서는 예수님 신비와의 친밀함을 가리킵니다.
마리아께서 “간직하고 되새기셨을”(루카 2,19) 때, 그분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신 아드님에 대하여 이 모성적 앎을 실행하고 계셨습니다. 아드님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뵙고” 계셨으며,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가정적인 방식으로 그리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보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께 최고의 방식으로 보이게 되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봄”은 그분의 관상과 전구와 영적 모성의 토대입니다.
IV. Theotokos와 하느님 얼굴의 계시: 도상학적 함의
8-9세기의 성화상 파괴 논쟁은 중요한 마리아론적 차원을 지녔습니다. 성화상의 옹호자들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르마노, 다마스쿠스의 요한, 스투디오스의 테오도로는 그리스도의 성화상이 지니는 정당성이 강생에 근거한다고 논증하였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보이는 인간의 얼굴을 취하셨기에 그분을 성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는 말씀은 그리스도론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상학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성화상 안에서의 마리아 표현, 곧 Theotokos, Hodegetria(“길을 가리키시는 분”), Glykophilousa(“부드럽게 입 맞추시는 분”)는 바로 이 논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드님을 가리키시는 마리아를 뵙는 것은 아드님을 뵙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뵙는 것은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마리아 도상학은 그리스도론적 도상학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장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시는 마리아를 통하여 신자는 아버지를 뵙는 데로 인도됩니다.
Hodegetria 성화상, 곧 왼팔에 안으신 아드님을 오른손으로 가리키시는 마리아의 성화상은 이 논리의 가장 직접적인 도상학적 표현입니다. 마리아의 몸짓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몸짓이 아니라 아드님을 가리키는 몸짓입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그 몸짓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아드님은 아버지를 “주해하시는”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을 뵙는 것은 아버지를 뵙는 것입니다.
현대의 도상학 쇄신, 특히 서방의 성화상 운동은 마리아 성화상이 지닌 이 신학적 깊이를 재발견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성화상은 신심을 위한 초상화가 아니라 신비를 향한 창입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관상하는 것은 아드님을 향한 마리아의 시선에 참여하는 것이고, 보이게 되신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봄”을 나누는 것이며, 마리아께서 낳으신 아드님의 얼굴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아버지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더 친밀하게 아드님을 뵌 마리아께서는, 유일하게 보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뵙고자” 하는 이에게 탁월한 인도자이십니다.
참고 문헌
- 다마스쿠스의 요한, De Imaginibus, Or. I-III.
- 리옹의 성 이레네오, Adversus Haereses, IV, 6.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Lumen Gentium, 65항 (1964).
- P. Evdokimov, L’Art de l’Icône: Théologie de la Beauté (1970).
- G. Gharib, Le Icone Marian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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