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자기 주인보다 크지 않다: 마리아와 드높이는 섬김

Non est servus maior domino suo: Maria e o serviço que exalta

글: · 업데이트

Non est servus maior domino suo, neque apostolus maior eo qui misit illum.
요한 13,16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고, 파견된 이는 자기를 파견한 이보다 크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이 말씀을 하십니다(요한 13,1-17). 그 행위는 기대되던 모든 위계를 뒤집었습니다. 주님께서 섬기시고, 스승께서 발을 씻어 주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께서 갈릴래아 어부들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이 행위 뒤에 예수님께서 정식화하시는 원리는 그 행위에 대한 그분의 해석입니다. 곧 섬김은 낮추지 않고 드높입니다. 마리아론은 이 논리에서 가장 풍요로운 주제 가운데 하나를 발견합니다. ancilla Domini, 곧 주님의 종은 바로 섬김 안에서 자신의 최고 존엄을 받습니다.

I. 발 씻김: 위계의 전복과 위대함의 새로운 모범

요한 13,1-17은 발 씻김을 보기 드문 장엄함으로 전합니다. 복음사가는 이 행위에 신학적 깊이를 지닌 서술을 서문처럼 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요한 13,3). 당신의 신적 기원과 영원한 운명을 아시는 바로 이 예수님께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은 섬김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섬김의 토대가 됩니다.

이 요한적 원리는 위대함이 섬김을 배제한다고 여기는 세상의 논리와 정확히 반대됩니다. 예수님의 논리에서 참된 위대함은 섬김 안에서 표현됩니다. 아랫사람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는 이의 관대한 양보로서가 아니라, 사랑 자체의 본성의 표현으로서 그러합니다.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발을 씻어 주시는 섬김은 이 “끝까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를 바로 그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저항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요한 13,8). 그의 저항은 복음과 정반대되는 존엄 이해를 드러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자기 발을 씻으시도록 허락하는 것은 주님을 낮추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논리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주님께 씻김을 받는 것, 그분의 섬김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과 이루는 친교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발 씻김을 세례의 예형으로 보는 해석(예수님께서 요한 13,8에서 말씀하시는 “몫”을 전통은 세례와 관련하여 해석합니다)과 성찬례의 예형으로 보는 해석(요한 복음에서 발 씻김은 최후 만찬에 앞섭니다)은 이 행위의 성사적 차원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겸손에 관한 도덕적 본보기에 그치지 않고, 그분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 자체입니다. 곧 내려오시고 씻으시고 정화하시되,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그리하십니다.

II. “Ancilla domini”: 마리아와 섬김의 존엄

루카 1,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idou he doule kyriou). 마리아께서는 당신 역사와 세계 역사의 가장 장엄한 순간에 당신 자신을 “종”, 곧 그리스 말로 문자 그대로 “여자 노예”를 뜻하는 doule로 밝히십니다. 이 자기 호칭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하느님과 맺으시는 관계와 그분 앞에서 존재하시는 방식의 가장 정확한 표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강요 때문에 순종하는 이처럼 하느님의 종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이처럼, 다른 분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는 이처럼 종이십니다.

ancilla Domini라는 칭호는 마리아론 전통에서 깊이 탐구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덕의 어머니가 되는 덕인 “겸손”(humilitas)의 모범을 보았습니다. 곧 겉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참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겸손”은 열등감이 아니라,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고 온 존재로 창조주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이의 현실주의입니다.

Magnificat는 ancilla의 신학을 놀라운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의 tapeinôsis, 곧 “비천한 처지”, “낮은 신분”이 바로 하느님께서 “굽어보신”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함도, 그분의 공로도, 그분의 도덕적 완전함도 아니라, 그분의 “비천함”, 그분께서 종이심, 그분의 위대함의 근거를 당신 자신 안에 지니지 않으심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낮추어짐”을 굽어보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십니다.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라”(루카 1,48).

Magnificat의 논리는 바로 발 씻김의 논리입니다. 위대함은 섬김에서 오고, 드높여짐은 겸손에서 오며, 영예는 내어 줌에서 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2). 마리아께서는 구원 역사가 끊임없이 확인해 주는 원리를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영예를 주는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이들에게 영예를 주십니다.

III.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여라”: 마리아와 섬김의 명령

요한 13,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는 관상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본받기 위한 것입니다. 섬김의 명령은 사랑의 명령(요한 13,34)만큼이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섬기지 않고서는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발 씻김은 요한 13,34의 “새 계명”이 말로 정식화하는 사랑을 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전통 안에서 마리아는 이 명령을 지키는 모범이십니다. 성모 방문(루카 1,39-56)은 가장 직접적인 행위입니다.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받으시자마자 “서둘러 길을 떠나”(meta spoudes) 그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 서두름은 충동이 아니라 섬김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절박함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은총을 막 받으신 마리아께서는 그것을 당신만을 위하여 간직하지 않으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를 섬기러 떠나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는 같은 감수성을 드러냅니다. 마리아께서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채시고, 가장 먼저 전구하시며, 일꾼들을 가장 먼저 성자께 대한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카나에서 그분의 전구는 영적인 과시가 아니라, 남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며 중심을 차지하지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용한 섬김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마리아께서는 해결을 주도하지 않으시고, 해결을 지니신 분을 가리키십니다.

수도 전통이 마리아 안에서 수도 생활의 모범을 알아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순명 서원을 하는 수녀나 수도승은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의 fiat를 되풀이하며, 자기 뜻을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표현으로 자기 뜻을 장상에게 내어 맡깁니다. 성 베네딕도에서부터 클라라 수녀회 회칙과 예수회 회헌에 이르기까지 탐구된 이 유비는, 마리아의 섬김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의 틀을 이루었는지 보여 줍니다. 곧 노예와 같은 순종이 아니라, 다른 이의 뜻 안에서 하느님 뜻의 표현을 발견하는 사랑의 내어 줌입니다.

IV.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종말론적 증언으로서의 섬김

요한 15,19: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 역설적 단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을 대조의 정체성으로 규정합니다. 발 씻김은 이 대조의 가장 눈에 띄는 표지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서는 더 큰 권한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이 섬깁니다. 이 대조는 겸손의 연출이 아니라 다른 논리, 곧 하느님 나라의 논리에 대한 증언입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죄에서 보호되셨으며, 온전히 성자를 향하여 사셨고,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께서는 영적 모성의 차원에서 계속 “섬기십니다”. 그분의 전구, 영적 자녀들 곁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 교회 생활 안에서 auxiliatrix로서 그분께서 지니시는 역할, 이 모든 것은 그분께서 지상 생애에서 실천하신 섬김이 시간의 한계를 넘어 연장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종말론은 여기에서 특별한 차원을 지닙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의 섬김을 끝내지 않고 변모시켰습니다. 역사 안에서 섬기신 그분께서는 영광 안에서 계속 섬기십니다. 카나에서 전구하신 그분께서는 이제 영광스럽게 되신 성자 곁에서 온전한 권위로 전구하십니다. 주님 탄생 예고의 “fiat”와 함께 시작된 섬김은 끝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온 존재를 내어 드리신 성자의 사랑처럼 영원합니다.

마리아의 “섬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심, 곧 그분의 이름 아래 자리 잡고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배우지 못한 이들을 섬기며 그분을 본받는 수많은 수도회와 수도 단체는 이 논리의 교회적 표현입니다. 섬김은 낮추지 않고 드높입니다. 종은 존재론적 존엄에서 주인보다 “작은” 이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인 내어 줌의 논리에서 “작은” 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음” 안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섬김 안에서 당신의 최고 존엄을 받으신 “주님의 종”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람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처럼 세상의 발을 씻어 주는 교회의 모범이십니다.

참고 문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Lumen Gentium, 56-59항 (1964).
  • 요한 바오로 2세, Redemptoris Mater, 38-41항 (1987).
  • 성 아우구스티노, In Iohannem, Tract. LVIII(요한 13장에 관하여).
  • H. U. 폰 발타사르, Das betrachtende Gebet (1955).
  • R. 로랑탱, Lourdes: Dossier des documents authentiques (1957).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마리아론 심화 교육을 원하십니까? Locus Mariologicus의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을 만나보세요 – 신학적 엄밀성과 영성 생활과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을 하나로 잇는 학문적 교육 과정입니다.

대기자 명단에 등록하기 →

마리아론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으십니까?

이 글은 Locus Mariologicus 도서관의 장서에서 비롯합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은 학문적 지도와 함께 여러분을 같은 원천으로 이끕니다. 곧 성경, 교부, 교도권이며, 첫 교의에서 현대의 물음들에 이르기까지입니다.

마리아론 대학원 과정 만나보기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