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datum novum: 마리아와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사랑

글: Prof. Dr. Daniel C. Afonso · 업데이트
Mandatum novum do vobis: ut diligatis invicem, sicut dilexi vos.
요한 13,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는 “새 계명”을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 계명의 새로움은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있지 않습니다. 구약이 이미 그것을 명령하였습니다(레위 19,18). 새로움은 그 척도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곧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모범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마리아론은 이 계명 안에서 고유한 자리를 발견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랑을 가장 충만히 살아 내신 피조물이십니다.
I.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새로움: “Sicut dilexi vos”
요한 13,34의 “새 계명”은 그 실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예수님께서 이미 인용하신(마르코 12,31) 구약의 계명입니다(레위 19,18). 새로움은 그 척도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kathōs ēgapēsa hymas). 요한의 이 “처럼”(kathōs)은 결정적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단지 드높여진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사랑을 모범이자 원천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온전한 내어 줌에까지 이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요한 13,34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그 계명에 구체적인 “처럼”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며, 반드시 눈에 띄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근본적인 방식으로, 곧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기 자신의 선보다 다른 이의 선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신학은 일찍부터 eros(다른 이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선을 찾는 이끌림의 사랑)와 agape(대가 없이 다른 이의 선을 찾는 선물의 사랑)를 구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바로 agape의 계명입니다. 상호성에 의존하지 않고, 보답을 재지 않으며, 대가를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초자연적이며 본성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기에 오직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하느님의 영을 받는 이만이 신적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 Deus Caritas Est(2005)에서 탁월하게 탐구하신 eros와 agape의 구별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이 eros를 없애지 않고 그것을 정화하며 드높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모범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정화된 사랑을 살아 내셨습니다. 아드님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단지 모성적인 것(모성적 eros)이 아니라 봉사와 희생과 온전한 내어 줌의 차원을 포함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갈바리아는 당신 자신의 실존에 적용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끝까지, 아낌없이, 달아남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II. 마리아, “새 계명”의 모범
마리아론 전통은 언제나 마리아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최고 모범을 알아보았습니다. 단지 그분께서 모성적 사랑으로 아드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은 이해할 수 있고 또 기대할 수 있는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세우신 그 형태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끝까지, 아낌없이, 고통과 침묵을 통하여, 사랑이 패배한 듯 보일 때에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장면은 마리아의 사랑을 온전한 내어 줌으로 보여 줍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는 agape 사랑의 정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이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입니다. 하느님의 선과 세상의 선을 자기 자신의 선이나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 위에 두는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명하실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입니다.
엘리사벳 방문(루카 1,39-56)은 마리아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엘리사벳을 섬기러 “서둘러 길을 떠나셨습니다”. 이어지는 Magnificat은 마리아의 사랑을 찬미와 증언으로 보여 줍니다. 기쁨과 하느님의 위대한 일에 대한 선포로 넘쳐흐르는 사랑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는 마리아의 사랑을 전구로 보여 줍니다. 청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을 위하여 전구하시고, 필요가 드러나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리시며, 과시 없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바리아는 그 정점입니다. 십자가 곁의 마리아께서는 단지 고통받는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랑이 달아났을 때에도 “머무르는” 사랑의 표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예수님 당신 다음으로 십자가 곁의 마리아 안에서 가장 완전한 모범을 지닙니다. “e stabat Mater dolorosa iuxta Crucem lacrimosa”, 곧 고통의 어머니께서 십자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쓰러지지 않고 서 계셨습니다. 부재하지 않고 현존하셨습니다. 달아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III. “사랑으로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아볼 것이다”: 마리아와 교회의 증언
요한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가 식별되는 “표징”은 권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조직도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진술은 교회론과 교회의 사명에 근본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가장 강력한 그리스도교적 증언은 지적 논증도 사회적 행동도 아니라, “새 계명”을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Mater Ecclesiae이신 마리아께서는 이 증언의 중심에 계십니다. “모두 마리아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사도행전 1,14의 다락방은 “새 계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실 성령을 기다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공동체에서 태어났고, 그 사랑의 표상으로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보호 아래 자신을 맡긴 수도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역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사랑이 형제적 사랑을 빚어낸다는 직관을 표현하였습니다. 중세의 베긴회에서 루이사 드 마리약의 애덕 자매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동체의 생활 규칙은 바로 사랑의 봉사와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의 모범으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새 계명”을 가장 충만히 살아 내신 그분께서는 그것을 살고자 하는 이에게 가장 확실한 인도자이십니다.
마리아 신심을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과 연결하는 현대적 발전인 사회적 마리아론은 “새 계명” 안에서 가장 견고한 토대를 발견합니다. Magnificat에서 하느님께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다”(루카 1,52-53)고 선포하신 마리아께서는 자기 안에 닫히지 않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넘치는 사랑의 표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버려진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IV. “머무르는” 사랑: 마리아와 영원한 친교
1코린 13,13: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 너머에 “머무르는” 유일한 실재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뵙는 일 안에서 이루어지고 희망은 성취 안에서 완성되지만, 하느님이시며 구원받은 이들이 참여하는 그 사랑은 영원히 머무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지상 생활을 위한 잠정적인 법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생명의 영원한 법의 선취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께서는 이 영원한 사랑을 그 충만함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달아남 없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신 그분께서는 이제 삼위일체적 생명인 사랑의 온전한 친교 안에 사십니다. 그분의 전구는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영적 자녀를 사랑하신 그분께서는 지상 생애 내내 살아가며 배우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위하여 전구하십니다.
이렇게 영광을 받으신 마리아를 관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그 종말론적 충만함 속에서 관상하는 것입니다. 영광 중의 마리아를 뵙는 것은 “새 계명”이 그 결정적 실현에 이를 때 무엇을 낳는지 보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였기에 하느님이신 사랑의 충만함 속에 사는 한 인간 피조물을 보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전망은 현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재에 의미를 주는 지평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마리아께서 이미 계신 곳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개념보다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부정신학 전통은 마리아 안에서 가장 다가가기 쉬운 표현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리아께 지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길”이 최고로 사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주님 탄생 예고의 “fiat”로 시작하여 숨은 생활의 수십 년에 걸쳐 자라났고, 갈바리아의 고통 속에서 정련되었으며, 성령 안에서 아드님과 아버지와 누리는 영원한 친교 안에서 그 충만함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끝까지 아낌없이 사랑하신 마리아께서는 “새 계명”의 모범이시며, 사랑으로 알려지기를 바라는 교회의 인도자이십니다.
참고 문헌
- 베네딕토 16세, Deus Caritas Est, 1-18항 (2005).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Lumen Gentium, 63-65항 (1964).
- 요한 바오로 2세, Redemptoris Mater, 45-47항 (1987).
- C. Spicq, Agapè dans le Nouveau Testament, vol. III (1959).
- H. U. von Balthasar, Mary for Today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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