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 mundus vos odit: 마리아와 박해 속의 증언

Si mundus vos odit, scitote quia me priorem vobis odio habuit.
요한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요한 15,18-25은 고별 담화 안에 갈등의 현실을 들여놓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며, 그 때문에 세상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비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단언은 사실 위로와 방향 제시의 말씀입니다. 박해는 결핍의 표지가 아니라 충실함의 표지입니다. 마리아론은 이 본문에서 깊은 묵상의 지점을 발견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세상의 미움”을 실제로, 또 오랜 기간에 걸쳐 겪으셨고, 그 역경 속에서 보여 주신 충실함은 모든 시대에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모범입니다.
I. 요한 복음의 “세상”: 하나의 신학적 범주
요한 복음에서 “세상”(kosmos)은 물리적 세계, 곧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신”(요한 3,16)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조직된 인간 질서로서의 “세상”,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요한 3,19) 하느님께 의탁하는 대신 자기 충족을 택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세상”은 지리적이거나 종족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존적 선택입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다(요한 17,16).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적개심은 요한 15,19에 따르면 선택의 결과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박해는 우연이 아니라, 자기 논리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세상”의 예측 가능한 응답입니다. 복음의 논리에 따라 사는 사람, 곧 권력 대신 섬김을, 복수 대신 용서를, 축적 대신 가난을 택하는 사람은 그 반대 논리에 따라 사는 이들의 적개심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갈등에 관한 이 요한적 사회학은 역사적 확증을 지닙니다. 교회의 박해는 1세기만의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21세기에도 계속됩니다. 중동에서, 중국에서, 북한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순교자 수는 그 이전의 모든 세기를 합한 것보다 많았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복음의 생명력을 확인해 줍니다. 가장 심하게 박해받는 교회가 흔히 가장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 안에 있음”과 “세상에 속함” 사이의 요한적 구별은 고유한 마리아론적 차원을 지닙니다. 마리아께서는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에서, 이집트에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서 “세상 안에” 사셨지만, 요한적 의미에서 결코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원죄에서 보호받으신 그분께서는 자기 충족과 하느님 거부라는 세상의 논리 없이 세상 안에 사셨습니다. 동방 이콘이 그 고요한 초연함으로 표현하는, 세상 속 마리아의 이 “다름”은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 현존의 모범입니다. 곧 들어가 있되 흡수되지 않고, 현존하되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II. 이집트 피난 중의 마리아: 아드님과 함께 박해받으신 분
마태 2,13-15은 이집트로의 피난을 이야기합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하자 성가정은 한밤중에 피신해야 했습니다. 아드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세상의 미움”인 이 박해는 마리아께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그분은 박해받는 아드님을 품에 안고 가는 어머니, 자기 집을 버리는 어머니, 아드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 이유로 유배 생활을 하는 어머니이십니다. 아드님에 대한 박해는 어머니께 고스란히 미칩니다. 예수님을 “먼저” 미워한 “세상”은 마리아도 박해하였습니다.
전통은 성가정을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난민으로 보았습니다. 이 차원은 현대 마리아론에서 점점 더 깊이 탐구되고 있습니다. 박해받는 아드님과 함께 피신하신 마리아께서는 모든 박해받는 이, 모든 난민, 신앙 때문이든 폭력 때문이든 자기 땅을 떠나야 했던 모든 이의 표상이십니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매우 생생한, 이주와 난민 상황 속의 마리아 신심은 바로 이 실제적 동일시에 뿌리를 둡니다. 마리아께서는 박해받고 쫓겨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겪어 아십니다.
성경 신학에서 이집트의 예형론은 풍요롭습니다. 이집트는 유배와 종살이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느님 섭리의 자리입니다(이집트의 요셉, 창세기 37-50).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은 유배로의 회귀(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약속의 성취(이집트에서 나오는 새 이스라엘, 마태 2,15에 인용된 호세아 11,1)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여정을 “다시 밟으시며”, 예수님께서 고난과 유배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이심을 확인해 주십니다.
이 초기 박해의 예언적 차원은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베들레헴에서 박해받으며 시작하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마치실 것입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그분께 닥친 “세상의 미움”은 시간이 흐른다고 줄어들지 않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더해집니다. 마리아께서는 점점 깊어지는 이 박해의 여정에 동반하십니다. 이집트로 향한 한밤의 피난에서 갈바리아의 “stabat Mater dolorosa”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박해받으시는 아드님께 대한 그분의 충실함은 요한 15,9이 요구하는 “사랑 안에 머무름”의 구체적 형태입니다.
III. “나를 먼저 미워하였다”: 박해받는 이들과 그리스도의 연대
요한 15,18: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이 단언은 단순한 수사적 위로가 아니라 실제적인 연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모르시는 박해를 제자들에게 견디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몸소 견디신 것을 함께 나누라고 요구하십니다. 박해 안에서의 이 연대는 깊은 신비적 차원을 지닙니다. 그리스도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난받는 것도, 대리자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으며 그분의 수난에 참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원리를 힘차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새 1,24). 이 역설적 단언은, 무한히 충분한 그리스도의 환난에 어떻게 무엇인가가 “모자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낳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요한적 논리 안에서 정확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은 구원을 위하여 충분하지만, 각 세대가 박해 속에서 주님의 연대를 체험하도록 그 지체들의 구체적 역사 안에서 “채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연대의 첫째가는 가장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십자가 곁에서, 유배 속에서, 박해 속에서 아드님과 “함께” 고통받으신 그분께서는 박해받는 이들을 위하여 가장 권위 있는 전구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에서부터 아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아드님께 드리는 그분의 전구는 흔들림 없이 박해를 통과한 이의 신빙성을 지닙니다. 모든 시대의 순교자들이 바로 이 때문에 마리아를 박해 중의 동반자로 불러 왔습니다.
루르드 발현(1858)은 세속주의 국가에 의한 프랑스 교회의 박해가 심해지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린이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신 마리아의 모습은 예언적 차원을 지닙니다. 교회를 “미워하는” “세상”은 가장 연약한 이들 곁에 계시는 마리아의 현존을 막지 못합니다. 교회가 승인한 모든 발현은 이 표징을 지닙니다. 곧 박해가 가장 극심해 보이는 바로 그곳에 어머니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IV. Maria Regina martyrum: 순교자의 모후와 박해 중의 희망
Regina Martyrum, 곧 순교자의 모후라는 성모 칭호는 마리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의미로 순교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가장 온전한 의미로 “martyrium”을 사셨다는 사실, 곧 갈바리아의 고통을 통하여 끝까지 그리스도께 충실한 증언을 드리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순교자는 어원적으로 “증인”입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마리아보다 더 온전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은 언제나 마리아를 자신들의 모후이며 모범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가 보존한 리옹 순교자들의 편지(기원후 177년)는 초기 순교자들 사이에 있던, 마리아께 대한 효성스러운 신심을 드러냅니다. 일본 순교자들(17세기), 멕시코 순교자들(20세기), 공산주의 아래의 순교자들의 행전은 모두 증언의 지극한 순간에 마리아를 불렀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실” 성령과 “증언할” 제자들에 관한 요한 15,26-27의 약속은 그리스도인 martyrium의 구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언제나 성령과 신자의 이중 증언입니다. 성모 영보 때에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 강림 때에 함께 계셨던 마리아께서는 이 이중 증언을 가장 온전히 사신 분이십니다. 곧 당신 안에 계신 성령의 증언과, 아드님께 대한 충실함 안에서 드리신 당신 자신의 증언입니다.
21세기의 박해받는 교회는 순교자의 모후이신 마리아 안에서 가장 가까운 동반자를 발견합니다. 세상이 아드님을 미워하고 죽였을 때에도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신” 그분께서는 “머무름”이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당신을 가득 채우신 그 같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보증이십니다. 마리아의 “순교”, 곧 아드님께 드린 그분 생애의 온전한 증언은 박해받는 온 교회가 앞에 두고 있는 지평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승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분께서 결정적으로 확인해 주실 충실함입니다.
박해받으시는 아드님 곁에서 “세상의 미움”을 겪으신 마리아께서는 순교자의 모후이시며, 역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동반자이십니다.
참고 문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Lumen Gentium, 58항 (1964).
- 요한 바오로 2세, Veritatis Splendor, 90-94항 (1993).
- 베네딕토 16세, Deus Caritas Est, 40항 (2005).
- R. Laurentin, Lourdes: Dossier des documents authentiques, 제1권 (1957).
- P. Poupard (편), Dictionnaire des Religions, “Martyre” 항목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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