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ba vitae aeternae: 마리아와 머무르는 신앙

Domine, ad quem ibimus? Verba vitae aeternae habes.
요한 6,68
생명의 빵 담론 뒤에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저버릴 때, 곧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큰 이탈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돌아서시어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베드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 가운데 하나로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론은 이 장면에서 특권적인 성찰의 지점을 발견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베드로와 사도들에 앞서, 모든 것이 떠나라고 부추길 때에 머무르신 충실한 분이셨습니다.
I. 요한 복음서 6장의 신앙 위기와 제자들의 항구함
요한 6,60-71은 요한 계열 복음서에서 가장 큰 신앙의 위기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는 담론은 걸림돌을 일으킵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듣다”에 해당하는 그리스말 동사는 akouein인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자주 “받아들이다”, “수용하다”의 뜻을 지닙니다. 어려움은 청각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인간의 범주에 도전하며 이해를 넘어서는 동의를 요구합니다.
본문은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뒤로 물러가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하고 말합니다. 이 배교는, 신앙을 저버린다는 전문적 의미에서 배교이기에 하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의 공공연한 원수들의 배교가 아닙니다. 그 담론을 들었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그분의 표징들을 보았던 바로 그 제자들의 배교입니다. 요한 6장의 위기는 요한 18-19장의 위기를 앞당겨 보여 줍니다. 대사제의 뜰에서도 갈바리아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저버립니다.
이 이탈의 물결을 거슬러 베드로는 항구함을 표명합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고백에는 고유한 구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담론을 “이해하는” 이의 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저희는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달리 대안이 없음을 알아보는 이의 고백입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오직 그분만이 인간 실존의 궁극적 의미의 열쇠를 지니고 계십니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요한 계열의 신앙은 온전한 이해에 바탕을 둔 신앙이 아니라 신뢰의 관계에 바탕을 둔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성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범입니다. 미리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즉각적인 소화 능력을 넘어설 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이 모범은 마리아 안에서 최고의 상징을 지닙니다.
II. 머무르신 충실한 분, 마리아
복음 이야기는 요한 6장의 사건에 마리아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저버리는 이들 가운데에도, 남는 이들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론 전통은 요한 6장의 사건이 극적으로 드러내는 신앙의 항구함에서 언제나 마리아를 최고의 모범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예”가 무엇을 함축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말씀하신 그분께서, 다른 이들이 저버릴 때에 머무르신 충실한 분이십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믿으신 분”(hē pisteusasa, 루카 1,45)이라고 인사합니다. 부정과거 분사는 항구한 상태를 여는 신앙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마리아께서는 한순간에 “믿으신” 것만이 아니라, 믿는 분이시며, 신앙 안에 사시는 분이시고, 아드님께 대한 신뢰 안에 머무르시는 분이십니다. 이 신앙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몰이해(“그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루카 2,50)와 겉으로 드러난 거절(“누가 내 어머니냐”?, 마르코 3,33)과 십자가의 침묵을 통과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Redemptoris Mater에서 마리아의 “신앙의 순례”라는 개념을 길게 전개하였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믿으신 그분께서는 평생에 걸쳐 시련을 겪으셨고, 그 시련 하나하나가 그분의 신앙을 더 깊게 하고 정화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의 케노시스”, 곧 어둠과 하느님의 침묵과 몰이해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보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케노시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갈바리아는 이 순례의 가장 높은 지점입니다. 제자들이 달아날 때에 마리아께서는 머무르십니다. 십자가가 그분을 찢어 놓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메온이 예고한 칼(루카 2,35)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이 십자가의 걸림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들으신 그분께서는, 아드님의 외견상의 실패로 그 말씀이 부정된 듯 보이는 지금에도 그 말씀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마리아 신앙의 절정입니다. 부활 이전에 부활을 믿는 신앙, 확인되기 전에 생명을 믿는 신앙입니다.
III. “때가 이르러”: 몸의 성전과 신앙의 이해
요한 2,22: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의 신앙은 새로운 구조를 지닙니다. 눈먼 신앙이 아니라, 전에는 어두웠던 것을 부활의 빛으로 “이해하는” 신앙입니다. 듣기에 “거북하였던”(요한 6,60)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빛나는 말씀이 됩니다.
교부 전통과 중세 전통은 역사적 신앙(예수님 생애의 사건들에 대한 동의)과 신학적 신앙(그 사건들이 지닌 구원적 의미에 대한 이해)을 구별하였습니다. 부활은 무에서 신앙을 창조하지 않고, 이미 현존하였으나 어두웠던 신앙을 심화하고 밝히며 확인합니다. “기억하고 믿게 되었다”, 곧 “기억함”(아남네시스)이 신앙의 이해를 위한 조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께서는 intelligentia fidei의 표상이십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들과 사건들의 의미가 빛으로 드러날 때까지 그것들을 “간직하고 되새기셨기”(루카 2,19.51) 때문입니다. 그분의 마음의 묵상은 신앙이 깊어지는 과정의 모범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음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받은 신비를 점진적으로 관상함으로써 깊어지는 것입니다.
Magnificat(루카 1,46-55)는 마리아의 이 intelligentia fidei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대한 깊은 앎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느님 약속에 대한 오랜 묵상을 전제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내지 않으십니다. 당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온 전통을 종합하십니다. 훗날 베드로가 말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마리아께서 당신 자신의 육신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아보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IV. “저희도 믿고 또 압니다”: 마리아와 고백하는 교회
요한 6,69: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두 동사를 사용합니다. pisteuein(믿다)과 ginoskein(알다)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이 두 동사는 자주 나란히 놓입니다. 신앙과 앎은 예수님과 맺는 관계의 상호 보완적인 두 측면입니다. 앎을 거부하는 눈먼 신앙도 아니고,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지성적인 앎도 아닙니다. 사람 전체가 관여하는 인격적 관계의 일치입니다.
신앙과 앎의 이 일치는 마리아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실현됩니다. 그분께서는 “믿으십니다”. 그분의 fiat는 외적 보증이 없는 순수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아십니다”. 그분의 Magnificat는 하느님께서 이루고 계신 일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를 보여 줍니다. 마리아께서는 소박한 신앙인이시며 동시에 관상하는 신학자이십니다. 신학교에 다니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안에 머무르던 은총이 그분을 신비의 중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교회는 마리아 안에서 자기 고백의 모범을 발견합니다. 신경은 지성적 정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 낸 신앙의 표현이며, 체험된 앎의 표현이고, 온 역사를 가로지르는 예수님과 맺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당신의 fiat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가장 먼저 고백하신 마리아께서는 기도하고 고백하며 관상하는 교회의 표상이십니다.
바오로 6세께서 선포하신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라는 칭호는 명예로운 칭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성적 관계의 표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신 것처럼 교회를 낳으십니다. 신앙으로, 순종으로, 사랑으로 낳으십니다. 교회가 “저희는 믿고 또 압니다” 하고 고백할 때마다, 마리아께서 주님 탄생 예고 때 당신의 “예”로 앞당겨 하신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마리아의 신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항구함은 다른 이들이 저버릴 때에 머무르신 마리아의 항구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저버릴 때에 머무르신 마리아께서는 이해를 넘어 항구하는 신앙, 오직 아드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신앙의 모범이십니다.
참고 문헌
- 요한 바오로 2세, Redemptoris Mater, 17-19항 (1987).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Lumen Gentium, 58항 (1964).
- R. Laurentin, Structure et Théologie de Luc I-II (1957).
- H. U. von Balthasar, The Glory of the Lord, 제1권.
- A. Serra, Maria e la Parola di Dio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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